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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11. 2023

퇴직하면 좋은 일들 하나

퇴직 전에는 선배들이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전해 주었습니다.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경제적 여유를 갖기 위해 가급적 자격증을 많이 따야 한다. 경조사비가 만만찮으니 웬만한 모임은 정리해라. 술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괜히 글쓴다가 깝죽대다가 건강을 해친다. 가족들도 이젠 남이라 여기고 너무 기대하지 마라. 등등 퇴직 후의 삶이 정말 삭막하고 살벌하게 느껴지끼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조바심도 나더군요. 나이 들어 자격증을 더 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딴다 한들 나이 든 사람을 채용해주는 곳이 생각보다 거의 없지요. 그렇게 걱정만 하다가 퇴직 후의 삶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퇴직 후를 대비하다가 그냥 휩쓸려 나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퇴직 전이나 후나 우리네 삶에 큰 변화가 있기 어려울 텐데, 선배들은 왜 그리 저에게 주문사항을 많이 말했을까요. 저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만, 지나치게 노파심이 작동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막상 퇴직해 보니, 우리집은 아내와 아이들 3남매 모두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저 혼자 백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해오던 '밥하기'는 이제 진짜 제 몫이 되었습니다. 같은 값이면 맛있는 건강식 밥을 한답시고 찹쌀, 팥, 흑미, 렌탈콩, 알밤, 백미까지 고루 고루 섞어서 했더니 아이들이 '역시 아버지가 해주신 밥 맛이 최곱니다.'라고 합니다. 한 끼를 하더라도, 한 그릇을 먹더라도 몸에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도록 제 나름 고민하면서 밥을 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기도합니다. 


"이 밥을 먹고 우리 식구들이 하루 건강하고 행복하길 빕니다. 지금까지 가장이랍시고 나에게 해준 것을 요렇게만 보답하려니 조금은 쑥스럽지만 그래도 맛있게 마련하니 당신 그리고 3남매가 잘 먹으면 좋겠습니다."


아내 출근길 태워주고 돌아오면 큰아들은 벌써 버스를 타고 직장에 가고 있다고 합니다. 딸이야 가장 일찍 집을 나서지요. 그렇게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면 청소 세탁 쓰레기 분리수거 택배 물품 정리 찬거리 쇼핑 등도 제 할일이 되었습니다. 전혀 힘들거나 귀찮지 않습니다. 그래도 바쁜 식구들을 위해 제 할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가끔 생각해 보면 현직 때보다 바쁘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래도 가족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가족을 위해 제가 충분히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집에서 늘 대기합니다. 아직은 코로나 백신 2차 접종 후유증을 앓고 있는 아내가 언제 호출할지 모르니까요. 나이만 먹었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우리집 3남매가 은행 업무 처리 등에 애먹는다 싶으면 제가 은행에 가서 각종 서류를 처리하기도 합니다. 처음엔 아이들이 저에게 전화를 부탁하는 것을 주저하였는데, 이젠 자연스럽게 하네요. 


퇴직 후 좋은 일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를 꼽는다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현직에 있을 때도 책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직장생활에 묶여 있기에 여의치 않았지요. 그러나 요즘은 인근 도서관에서 가서 책을 읽다가 5권을 대출하여 집으로 돌아와 재미있게 읽게 됩니다. 지금이야 책을 읽는다고 실용적 독서가 될 수 없지요. 대학 입시를 준비할 것도 아니고 무슨 자격증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책읽기가 아니니 편하고 가볍게 책을 읽습니다. 그러다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여유를 부리며 커피를 한 잔 마십니다. 진짜 삶의 여유를 누리는 느낌입니다. 심야에 책을 읽다가 밖으로 잠깐 나가 아파트 주차장을 가볍게 걸으며 시원한 바다 바람을 쐬기도 합니다. 그냥 기분이 좋아집니다. 가족들이 모두 깊이 잠들었을 때 잠깐 외출하여 산책하며 밤바다를 보는 호사도 좋더군요. 그러다가 편의점까지 가서 아이스크림을 좀 사서 돌아오다 밤새 고생하시는 경비원 분들에게 전하며 수고하신다고 인사까지 합니다. 그렇게 넉넉하게 사는 것이 퇴직 후의 여유로운 삶이 됩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저도 노쇠하여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하겠지요. 그건 그때 문제이고 미리 당겨서 걱정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편하게 생활하고 싶습니다. 퇴직 후 하루가 오롯이 제 선택에 의해 전개된다는 사실이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아침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 또 어떻게 보낼까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닐 듯합니다. 눈을 뜨면서 갑자기 오늘 하루 할일이 죽 나열된다면 그것이 삶의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너무 많아도 곤란하겠지요. 


누군가의 손길로 아침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많은 제가 가족이나 이웃을 위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인생의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에게 뭔가 부탁하거나 남이 어떻게 해주길 바라지 말고 내 쪽에서 먼저 변하고 베풀면 웬만한 갈등은 거의 해결이 됩니다. 오랜 기간 가족을 위해 헌신하여 이젠 퇴직 후 삶을 누린답시고 가만히 앉아 뭔가 받으려 하면 그때부터 삶은 불행 시작이 됩니다. 아내나 가족들 모두 이 가정을 위해 오랜 시간 헌신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특히 각 가정의 부인들이 긴 세월 가장과 가족을 위해 고생한 시간들은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남자 가장들이 퇴직 후 집안으로 들어와 이젠 편하게 대접받으며 살고 싶단는 욕망이 커질 때 지금까지 말없이 집안을 지키며 고생 고생한 부인은 집 밖으로 나가 여태껏 못 만난 사람들과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어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일은 일방적인 것이 없습니다. 상대방에 뭔가를 해주길 바란다면 내가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그건 인간관게에서 가장 단순한 삶의 원리입니다. 가족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줄 것이라는 착각을 많이 하지요. 가족도 엄연히 인간관계가 작동합니다. 대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다른 사람을 탓할 생각말고 스스로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바깥에서도 그렇지만 가족 내에서도 더욱 그러합니다. 젊은 날 온갖 고생을 하고 헌신했는데, 나이 들어 가족들로부터 소외받는다는 남자 가장들의 푸념, 하소연 등을 유튜브 동영상에서 자주 접합니다. 어느 유튜브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세 남자가 나와 술집에서 서로의 삶에 대해 푸념을 털어놓는 중에 이런 말이 들리더군요. 


"마누라, 아이들 아무리 고생해서 해줘 봤자, 내 나이 들어보니 아무 소요없더라. 저녁에 집에 가면 소 닭보듯 하는데, 그땐 집 자체가 싫어지더라고. 내가 이런 꼴 보려고 지금까지 생고생했나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고.돈 벌어줄 때는 다들 말없이 잘해 주더니 내가 딱 퇴직하고 나니 식구들이 모두 냉정하더만, 자식들 잘 해줘 봤자 아무 소용없더라.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하고 아이들이나 마누라나 다 남이다 남!"


물론 그런 경우도 분명 있겠지요. 세상일이 어디 자로 그은 듯 간단하게 판단할 수 없지 않던가요. 사람마다 사정이 다 달라서 이런 경우, 저런 경우가 참 많지요. 어쨌든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 원리는 '내가 먼저 베풀어야 상대가 나에게 잘해준다.', '내가 잘 해준다고 해도 상대방이 반드시 잘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잘 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나에게 절대 잘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가족들이 출근하여 각자 직장에서 열심히 근무하는 동안에 저 혼자 거실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놓고 여유를 즐깁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펼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거실 창문 너머 파란 바다 하얀 구름을 바라봅니다. 태풍이 지나간 바다는 왜 저리 아름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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