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로 나라를 강국 대열에 올렸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조무령왕
조무령왕(趙武靈王)이 획기적인 개혁정책으로 강국을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사구궁에 3개월 동안 포위되어 굶어 죽었다. 참새 새끼를 먹으면서
무릇 의복이란 입기에 편하면 되고, 예의는 일을 행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夫服者, 所以便用也 ; 禮者, 所以便事也.
호복기사(胡服騎射)란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을 타 활을 쏜다는 뜻이다. 전국 7웅이라 일컫는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일곱 나라가 천하를 놓고 겨루고 있었다. 이때 조(趙)나라에 무령왕(武靈王)이 호복기사를 선언한다. 말을 타고 활을 쏜다는 것은 전쟁 상황에서 불가피하기에 큰 문제가 될 수 없었지만, 문제는 호복을 입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지만 오랑캐 복장을 한다는 것이 당시 조야에 용납이 되기 어려웠다. 무령왕이 즉위했을 당시 조나라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중산국(中山國)과 같은 인근 소국조차도 조나라를 괴롭혔다. 특히 북방의 유목민은 조나라에 큰 위협이었다. 유목은 전형적인 기마민족이라 정착 성격이 강한 중원의 전투 방식으로는 대응하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전국 7웅의 위치를 좀더 면밀하게 살펴 보면 조나라는 지리적으로 동호(東胡), 흉노(匈奴) 등 북방 유목민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그래서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그들의 침략에 자주 시달리게 된다. 이에 무령왕은 북방 유목민들과 전투를 치르면서 호인(胡人)들의 복장에 주목한다. 호인(胡人)들은 소매가 좁고 옷자락이 짧은 옷을 입어 움직임이 수월했다. 중국 영화 ‘황비홍’에서 이연걸 복장을 생각하면 적절한 예가 될 듯하다. 변발호복이라 무술을 겨룰 때 중국 한족 전형의 복장보다 간결하고 편리했다. 그런데 북방 유목 민족과 전쟁을 자주 치렀던 조나라 사람들의 옷은 품이 넓고 헐렁해 불편했다. 그리고 호인들이 말을 타고 다니며 활을 쏘면서 전투를 치르니, 보병 중심의 조나라 군사들에게 비해 기동성이 뛰어나고 편리했다.
조무령왕은 나라의 생존을 위해 강한 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어느 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강력한 군대의 보호가 없으면 사직은 망할 수밖에 없소. 어찌하면 좋겠소? 무릇 세상에 이름을 높이고자 하면 물려받은 풍속에 누를 끼칠 수밖에 없소. 그래서 나는 호복(胡服)을 입고자 하오."
無彊兵之救, 是亡社稷, 柰何. 夫有高世之名, 必有遺俗之累. 吾欲胡服. -司馬遷 史記 趙世家
이렇게 조무령왕은 B.C 307년 호복기사로 상징되는 개혁 정책을 선포한다. 호복기사는 그때까지의 중화 세계에서 이전부터 있어 왔던 귀족 전사의 전통적인 전술을 획기적으로 바꾸게 되는 전투 방식이다. 조나라를 비롯한 기존 중원의 전투 방식은 기본 단위가 병거(兵車) 중심의 전차전이었다. 네 필이 끄는 병거(兵車)에 마부에 해당하는 어자, 활을 든 차좌, 창을 든 차우로 3명이 1개 조였다. 세 명의 전사가 마부와 활쏘기, 과(戈)라는 창을 사용하였다. 그 뒤에 갑옷 입은 무사인 갑사, 보병, 치중 등 약 30여명이 한 편대를 이루는데 이 부대 단위를 1승(乘)이라 불렀다. 천승(千乘)지국이니 만승(萬乘)지국이라 하여 병력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병거 위주의 전차전은 약점이 많았다. 병거를 사용하려면 도로가 넓고 평탄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전장 상황에서 산악지대나 진창 같은 진흙탕 속 전투에선 병거가 치명적인 약점이 노출된다. 더욱이 북방의 흉노나 서방의 융족(戎族)은 유목 생활에 특화된 기마민족이기에 기동성이 매우 뛰어났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말타는 것이 능숙했다. 북방 기마민족을 오랑캐라고 경멸했지만, 전투에선 호복이 매우 편리했다.
실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를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거추장스러운 복장으로는 곤란하였다. 말도 잘 못 타는데 말 위에서 활을 쏘아 상대방을 맞추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무령왕이 방안을 펼치게 되는데, 소매도 짧고 허리도 졸라매는 간편한 호복을 새로운 복장으로 적용하게 한다. 의복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입는 것이지, 거추장스런 법도 때문이 아니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에서 나온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호복기사 개혁 정책을 펼쳐 조나라가 전국 시대에 일약 강대국으로 올라선다. 따지고 보면 복장 하나 바꾸는 정책이 결과적으로 국력 증강을 가져오고, 그것이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호복기사 개혁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오랜 세월 습관이 된 의복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더욱이 오랑캐 옷으로 바꿔 입게 하는 일이 더욱 힘들 일이었다. 화이사상(華夷思想)이 투철한 중국인들 입장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중국 한민족은 예로부터 이 사상을 통해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해 왔다. 그런 현실에서 신하들 상당수가 호복시가 개혁에 정면으로 저항한다. 특히 무령왕의 숙부인 공자 성(成)이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조무령왕의 호복기사 개혁을 실행하는데, 숙부 공자 성의 반대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위협과 협박을 하든, 설득과 회유를 통해 상대방을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반대파의 거두 공자 성이 조무령왕의 숙부란 점에서 그리 만만치 않았을 터! 공자 성이 호복기사를 반대하는 대표적인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 왕께서 우리 의복을 버리고 오랑캐의 옷을 의복을 입는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교화와 법도를 바꾸는 것이며,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고, 학자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자 중국의 풍습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今王舎此而襲遠方之服, 変古之教, 易古人道, 逆人之心, 而怫學者, 離中國.
공자 성(成)의 주장은 당시 귀족을 비롯한 조나라의 조야(朝野)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랑캐의 복장을 하다니. 이런 점에서 조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을 실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조무령왕은 실용정책을 매우 중요시한 사람이다.
실제로 조무령왕이 즉위하였을 때, 당시는 제후들이 왕을 칭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조무령왕은 그까짓 칭왕(稱王)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군(君)으로 칭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러한 사고를 가진 조무령왕이기에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오랑캐의 옷도 기꺼이 입으려고 했다. 그리고 공자 성의 강력한 주장에 대해 무령왕은 자신의 논리를 제시한다.
“무릇 의복이란 입기에 편하면 되고, 예의는 일을 행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성인은 지방의 풍속을 관찰해 그에 적합하게 행동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예의를 제정합니다. 이것은 백성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팔에 무늬를 아로새기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은 구월(甌越) 일대 백성들의 관습입니다.
이를 검게 물들이고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어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조악하게 만들어진 옷을 입는 것은 오나라의 풍습입니다. 그러므로 예법이나 복장은 같지 않으나 편리함을 추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방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함에 변화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일이 다르기 때문에 예법도 바뀝니다. 따라서 성인은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그 방법을 일치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가 정말로 일하는데 편리하다면 그 예법을 동일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夫服者, 所以便用也 ; 禮者, 所以便事也. 聖人觀鄕而順宜, 因事而制禮, 所以利其民而厚其國也. 夫翦髮文身, 錯臂左衽, 甌越之民也. 黑齒雕題, 卻冠秫絀, 大吳之國也. 故禮服莫同, 其便一也. 鄕異而用變, 事異而禮易. 是以聖人果可以利其國, 不一其用; 果可以便其事, 不同其禮.
공자 성과 거센 격론이 벌어지고, 결국 조무령왕이 공자 성을 설득하게 된다. 그후 공자 성이 실제로 호복을 입고 조회에 나타남으로써 권신들의 반발을 잠재웠다. 당시 조 무령왕의 개혁 정책에 대해 반대 입장에 섰던 보수적인 다른 원로대신들도 그들이 믿었던 공자 성이 설득당하자 어쩔 수 없이 호복을 입게 된다. 이후 무령왕은 본격적으로 개혁에 나섰다. 기마병을 중심으로 재편된 군대는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마침내 조나라는 전국시대 후기 진(秦)나라, 제(齊)나라와 함께 3강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실사구시를 추구하며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쳤던 조무령왕도 후사(後嗣) 문제에선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조나라를 강국 진(秦)나라에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 중흥시켰지만 말이다. BC 299년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은 서북지방을 경략하기 위해 10세에 불과한 아들 하(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가 혜문왕(惠文王)이다. 비의(肥義)를 혜문왕의 보좌역으로 삼고 자신은 주부(主父)라 칭했다.
혜문왕은 무령왕이 총애하는 오왜(吳娃)의 아들이었다. 최초에 태자로 책립되었던 맏아들 장(章)을 폐위하고, 오왜의 아들 하에게 전위했다. 그런데 총애하던 오왜가 사망하자, 이번에는 장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늠름한 맏아들 장(章)이 오히려 북면하여 신하로서 그 동생에게 굽히는 것을 보니 안타까웠다. 3년 후 무령왕은 장을 대(代)의 안양군(安陽君)에 봉하고, 전불례(田不禮)를 보좌역으로 임명했다.
당시 조의 최고 권력자는 무령왕의 숙부 성(成)이었다. 그는 혜문왕의 군사개혁을 반대하던 보수파로 구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조무령왕의 설득으로 호복까지 입고 조정에 들어서면서 호복기사 정책을 지지했지만. 공자 성에게는 이태(李兌)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다. 이태는 사태의 추이를 깊이 관찰한 후 곧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먼저 혜문왕을 보좌하던 비의를 찾아가 설득했다.
“공자 장이 사람이 강하고 마음이 교만한 데다 무리가 많고 욕심이 크니 사사로운 야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불례란 위인도 잔인하고 교만합니다.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대는 곧 불행하게 됩니다. 소인배의 생각은 얕습니다. 작은 이익에 연연하며 위험한 줄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서로 떠밀어 재앙에 빠집니다. 이들은 곧 일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대는 책임이 무겁고 권세가 크니 반란이 당신에게서 당신에게서 시작되고 재앙이 몰려들 것이니 당신이 먼저 화를 당할 입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인자는 만물을 사랑하지만, 지자는 화가 드러나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합니다. 어질지도 지혜롭지도 않은데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습니까? 그대는 병을 핑계로 나오지 말고 정치를 공자 성에게 맡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원망의 근원지도 재앙의 사다리도 되지 마십시오.”
仁者愛萬物而,智者備禍於未形. 不仁不智,何以爲國 子奚不稱疾毋出 傳政於公子成. 毋爲怨府, 毋爲禍梯.
그러나 비의는 거절한다. 주보(主父) 무령왕이 어린 혜문왕을 맡기면서 당부하였기에 변절할 수 없다는 결심을 보였다.
“정조가 있는 신하는 난이 닥쳐야 그 절개가 드러나고, 충신은 재앙이 닥쳐야 그 행동이 맑게 보이는 법이오. 당신이 내게 충고를 주셨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약속을 어길 수 없소.”
이태와 공자 성은 일을 일으킬 준비를 마쳤다. BC 295년, 무령왕과 혜문왕이 사구(沙丘)로 놀러가서 서로 다른 궁에 묵었다. 공자 장과 전불례가 무령왕의 명을 사칭해 혜문왕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비의가 먼저 왔으므로 그를 죽여야 했다. 혜문왕의 부하들과 공자 장 사이에 혼전이 벌어졌다.
기회를 노리던 공자 성과 이태가 공자 장을 소탕하고 집권했다. 당초 공자 장이 패하여 주보에게로 달아났는데 주보가 장을 받아들였다. 성과 이태가 사구궁을 포위했다. 공자 장을 죽인 후에 포위를 풀겠다는 애초의 공약을 어기고 무령왕을 구금했다. 공자 장 때문에 주보를 포위했으니 군사를 철수하면 멸족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계속 주보가 있는 궁을 포위했다. 그리고 궁중의 사람들에게 “늦게 나오는 자는 멸족당할 것이다.”라고 명령하니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주보는 나오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 참새 새끼를 찾아서 먹다가 석 달 남짓 지나 사구궁에서 굶어 주었다. 주보가 죽은 것이 확실하자 제후들에게 알렸다.
호복기사는 획기적인 개혁정책을 펼쳐 조나라를 강국으로 올라서게 했던 조무령왕이지만 후사 문제를 어설프게 처리하다가 사구궁에서 포위되어 맏아들은 참살을 당하고 본인은 3개월 포위되어 굶어 죽은 것이다. 첩의 미모에 혹해서 적자인 태자를 폐하고, 첩의 아들을 제위에 올렸다가 첩이 죽고 나자 다시 태자를 제위에 올리려 하는 등 우왕좌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