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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22. 2023

어떻게 생각해

매주 화요일 오전에는 집 근처 청소년 수련원에서 학교밖 청소년 대학입시 수능 실전 문제 1:1과외를 합니다. 물론 자원봉사니까 수당은 없지요.올해 3월부터 시작했으니 6개월이 끝나가네요. 올해 수능까지 최선을 다해 지도하려 합니다. 오늘은 이호철 소설 <큰산> 제시문을 놓고 둘이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여기서 큰산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 산이 크다는 것이죠."

"아니 그건 사전상의 의미이고, 이 소설에선 어떤 뜻일까.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문학 작품으로 드러내되 작가의 체험과 상상력이 허구로 만들어진 장르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를 응축한 것이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도 결국 우리들 삶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래서 소설에 쓰이는 소재 하나 하나가 상징적인 존재요, 작가가 ㅜ여하는 의미가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작가 이호철은 참 6.25때 북한 인민군 장교로 잠전했다가 포로가 되면서 남한 사회에 정착한 사람이지. 이호철 작가가 제시하는 큰산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구름에 가려진 큰산이라 했으니 우리 사회에 큰산과 같은 존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임을 작품 맥락 상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큰산'이 도대체 무엇일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


"잘 모르겠는데요. 뭔가 긍정적인 뜻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가 좀 어렵네요."

"무슨 답을 해도 지적하지 않는다. 네가 생각해서 말하는 것은 어떤 말도 의미가 있으니까."


그렇게 전개된 대화가 한참이나 진행됩니다. 아이도 서서히 자신의 생각을 밝혀 나갑니다. 그리고 간간이 스마트 폰에서 찾아 의미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스스로 신기해 합니다.  공동체적 가치까지 나왔습니다. 사람들의 이기적이 생각에 대비된다는 것까지 답하는 것을 보고 칭찬해 주었더니 싱긋 미소를 짓습니다.


"고무신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 공포감은 이해가 되지? 본문에 나와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고무신을 남의 집 마당에 던져 재앙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지 않길 바라고, 그러면 그것이 마당에 떨어진 것을 본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집에 던져 버리고, 그렇게 여러 집을 돌고 도는 고무신의 행적에서 사람들이 자기집만큼은 재앙이 들어오지 않길 바라지. 그렇다면 작가의 소설에서 나타난 이북에서 보았던 '찌까다비'는 왜 무서운 존재일까. 이 작품에선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으니 정해진 답은 없겠지."


 아이가 이번에는 자신의 생각을 술술 밝힙니다. 길을 가다가 무잎이 무성한 바위 한 쪽에 찌까다비 한 쪽이 쳐박혀 있으면, 그것도 비오는 날에 아무도 없는 밭에 그런 것을 보았을 때 두렵지 않을까요 라고 답하면서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저도 잘 했노라고 격려합니다. 이호철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정확하게 파악하긴 어렵겠지요. 독자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겠지만, 어쨌든 아이가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밝히는 것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오답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도 저와 6개월 정도 같이 공부하고 나니 자신감이 상당히 커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어떻게든 수능에서 1등급만 나왔으면 좋겠다. 그게 내 목표야. 한번 멋지게 해봐. 수능에서 1등급 나오면 검정고시 출신들은 내신이 없어서 수능 성적으로 내신을 적용하니 1등급이면 웬만한 대학은 가지 않을까."


그렇게 응원하다가 제가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담을 들려 주었습니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 어떤가 하고 말이지요.


겨울 방학이면 집집마다 지게를 지고 산을 두어 개 넘어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일년 내내 자라고 말라 있는 풀들을 베어 나뭇단으로 만든 다음 지게에 지고 옵니다. 나뭇단은 직사강형 모양이고 새끼줄로 세 줄로 꽁꽁 묶어 지게에 지면 머리 위로 한참 올라갑니다. 마른 풀이기에 그렇게 생각보다 무겁진 않지만 그래도 초등, 중학생들이 지게에 지고 산고개를 넘어가면 쉽진 않지요. 마을 아이들 30여 명이 고개를 넘어 넘어 숲이 별로 없는 민둥산 곳곳으로 흩어집니다. 오전 내내 마른 풀을 낫으로 차곡 차곡 베어 나뭇단을 다부지게 만들어 나갑니다. 저는 나무를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제 나뭇단은 좀 어설픕니다. 그래도 같이 간 친구 흉내를 내면서 따라하니 점심 때 쯤 되어 어엿한 한 짐이 됩니다. 그러면 계곡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인자 나뭇단 받치가믄서 하자. 그라고 생솔가지는 너무 많이 넣지 마래이. 나뭇짐이 무거버서 몬 지고 간데이."

나뭇단을 다부지게 하려면 가장 밑에 생솔가지를 조금 넣어 받쳐야 하는데, 나무하는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생솔가지를 너무 많이 너어 큰고생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저를 보고 들으라고 알려 준 것 같아요. 우리 동네 아이들보다 나무 경험이 훨씬 적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다들 나뭇집을 지고서 산비탈을 따라 올라옵니다. 나뭇군들이 전용으로 쓰는 산길을 따라 첫 고갯길에 일차적으로 모입니다. 그새 모두 나무를 꽤 많이 했습니다. 이런 산고갯길을 또 하나 더 넘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좀 쉬고 힘을 내어 간 다음 다시 그 고갯길에서 쉽니다. 마을이 저 아래 보이는 그 고개 말이지요.


첫 번째 고갯길에서 쉬고 있을 때는 각자가 잔디 밭에 편하게 누워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고, 저멀리 구비 구비 흘러가는 낙동강 물을 말없이 바라봅니다. 어떤 형들은 묏등에 기대 앉아 발은 비석 옆 좌판에 올리기고 합니다. 돌아가신 분 정신 사납게 말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형이 갑자기 저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면 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웅전'을 비롯한 고대 소설 읽었던 내용들을 들려 줍니다. 형들은 학교 가기는 싫어하는데, 제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게 들어주었지요. 박수도 치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다시 출발합니다. 산길은 한 줄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제일 뒷 줄에 서는 것을 꺼립니다. 그래서 덩치가 가장 큰 동네 형이 제일 뒷줄에 서고 나머지 앞에서 줄을 지어 걸어갑니다. 아랍상인들이 사막을 넘어가듯 말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고개는 쉬는 시간이 비교적 짧습니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이 바로 아래 보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마음이 저절로 급해집니다. 그런데 한번은 제가 두 번째 고개에서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서둘러 뛰듯 따라붙는데, 한참 가니 저쯤 커브길 끝 무렵에 덩치 큰 형이 보입니다. 소리를 지르면 될 텐데, 자존심에 그냥 참고 걸어갔지요. 한 30미터 쯤 쳐졌을까요. 그리고 그 형 뒷모습이 커브를 돌아 안 보일 때 길가 바로 옆 묘 위에 한 소녀가 서 있었습니다. 대낮이고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데다, 형들도 바로 커브를 들아간 즈음인데도 소녀가 묘 위에 서서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바라봅니다.


제가 진 나뭇짐도 무게가 상당한데도 갑자기 뛰고 싶어집니다. 지게를 지면 고개를 들기 불편합니다. 고개를 들어 그 소녀를 보면 그 소녀도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미소까지 띠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분명 귀신일 테지요. 하지만 낮에 출현하는 귀신은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긴 했어요. 그래도 제 마음엔 영판 귀신입니다. 그것도 묘 위에 서 있는 처녀 귀신, 소녀 귀신입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눈이 서로 마주칩니다. 제 마음은 정말 급해집니다. 저 커브만 돌면 형들이 있을 텐데. 그리고 저와 그 소녀가 횡대로 나란히 선 위치가 되고 난 뒤부터가 더 급해집니다. 그 소녀가 뒤에서 붕 날아와 제 나뭇집에 올라탈 것이다 싶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봅니다. 어린 시절 나뭇짐을 져 본 사람은 알 겁니다. 지게 지고 고개를 들거나, 우회전 좌회전 유턴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말입니다. 몇 번 돌아봐도 그녀는 묘 위에 그냥 가만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커브를 돌자마자 형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크게 안심하고 지게를 세운 다음 그냥 쫙 뻗어 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아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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