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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22. 2023

나이가 들면 넉넉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 고향 마을 동네 어귀에서 저녁마다 술에 취해 고성을 지르는 아저씨가 꼭 계셨습니다. 얼마나 불만이 많았던지 저녁 내내 동네 안 삼거리에서 술병을 든 채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욕설과 저주를 마구 퍼부었지요. 그런 소리가 들리면 마을 이장인 아버지께서 그분을 모시고 댁까지 갑니다. 그렇게 끌려가면서도 자꾸만 아무도 없는 골목을 돌아보며 팔을 크게 휘저으며 소리를 고래 고래 질렀습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회관 구판장에서 막걸리나 소주를 잔뜩 마시고, 결국 만취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살 달래가면서 그분을 모시고 가던 당시 모습이 그림처럼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집에 가서 아버지와 그 아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버지께서 집에 오셔서 대강을 말씀해 주십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었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보시기에 아재의 말씀 상당 부분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하십니다. 


물론 그렇게 고성으로 마을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비단 그분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분도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지만 목청이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제가 보기에 의아한 것이 있었지요. 왜 술을 드시면 곧장 댁으로 가지 않고 그렇게 들에서 일을 마치고 오는 사람들로 혼란한 동네 어귀 삼거리에서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동네 사람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일까였습니다. 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분들은 수명도 짧았습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체질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분들이 오래 살지는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은 고향 마을에 들러  옛날 이야기를 꺼내면 형수님들께서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살기도 어렵고, 하루 땟거리도 제대로 못할 때니 불만이 많아서 안 그랬겠는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기 불만인 기라예. 요새 젊은이들은 마을 입구에서 그렇게 절대 안 합니다. 하기야 가~들도 집안에서 부부싸움하는 거는 있겠지만 그래도 옛날 돌아가신 아재들처럼 그렇게 무식하게 소리 지르는 일은 요새는 거의 없지예."


70대 중후반을 넘어가는 형님들과 둘러앉아 옛날 이야기를 나눕니다. 형님들도 그런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시골 마을에 어쩌다 들렀을 때 형님 한 분이 휠체어에 앉아 저를 알아 볼 때 많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옆에 서서 대화를 나눕니다. 눈도 잘 안 보이는데도 저는 단번에 알아보더군요. 물론 고향마을에 들르면 제가 먼저 소개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위천1동 마을 이장 최00씨 둘째 아들 000입니다."


제가 고향 마을 회관에 매년 들르긴 하지만 어떤 분은 수십 년이 지나 얼굴을 마주한 경우 저를 잘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오기 직전 고향 마을 회관에 들렀을 때는 이장이 형수님들 중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분이셨습니다. 그 형수님께서 저를 놀립니다. 


"디럼요, 아재가 세상 버리신 게 언젠데 아직도 마을 이장 둘때 아들이라 캐요? 지금 이장이 누군지 아는교? 누군지 알만 마이 놀라실 낀데. ㅎㅎㅎ"


휠체어 앉은 채 저를 반겨 주시던 형님은 여름날 더위 때문에 나무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연신 제 팔을 잡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또래 서너 명은 우습게 양팔에 들어 빙빙 돌려주던 그 장대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휠체어에 앉아 제대로 운신도 못하고 말씀만 하시는 모습이 영 짠합니다. 몸이 많이 왜소해져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수년 간 병원에 있을 때보다 시골집 앞이라도 나와 앉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시면서 예전의 그 너털웃음을 보여 주십니다. 참 너그러운 형님이셨지요. 학교는 제대로 다니지 않았지만 우리 또래들에겐 정말 인자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분입니다. 그야말로 넉넉한 존재로 우리들에게 이미지화되었지요. 그 형님 댁은 먹거리가 풍부해서 착한 형수님께서 우리 또래들 지나가면 마루에 앉혀 놓고 음식을 많이 먹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가끔 대구에 볼일 보러가면 일부러 고향 마을 달성군 논공면 위천1동 우나리에 잠깐 차를 세웁니다. 미리 약속하지 않았기에 누구를 만날 일도 없지요. 그래서 옛 추억에 젖어 마을 골목길을 이리 저리 홀로 걸으며 추억에 젖어 봅니다. 문패는 그대로 있는데, 사람은 제 세상으로 가고, 집은 그대로인데 대문은 삭아 내렸고 마당엔 오랜 세월 아무도 걸음하지 않아 풀들만 계절에 따라 자랐다고 죽어가는 것이 슬프데요. 회관에 누군가 계시면 얼른 차를 운전하여 마을 근처 편의점에 가서 과자나 음료수 등을 많이 사가지고 회관에 들어섭니다. 아이고 그 꽃같던 형수님들이 이리 늙으셨네요. 젊은 날 살림 산다고 그렇게 바쁘게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가면서, 


"디럼, 아직 밥 안 잡샀지요? 뭐 디릴까. 배고플 낀데 우선 이기나 먹고 요기나 하이소." 라고 하면서 제가 좋아하던 강정이나 과일 등을 풍성하게 내오시던 형수님들이 이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영 불편하네요. 제가 일어나지 마시라고 해도 기어이 일어나 다가와 제 손을 덥석 잡습니다. 마을 형수님들이 시집 왔을 때 초등학교 갓 입학한 저에게 그래도 집안 시동생이라고 그리 각별하게 대햊주시던 그 형수님들이 80을 바라보시니 운신도 여의치 않고 웃으면 젊은 꽃같던 얼굴은 어디로 가셨는지.


제가 나이가 들어보니 그래도 사람들에게 넉넉하고 여유롭게 대하는 사람들이 참 보기 좋더군요. 말씀 한 마디를 해도 인정스럽게 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이쁜 말을 골라 하되, 천천히 잔잔히 건네는 어른들이 보기 좋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무슨 허물이 있다 해도 넉넉하게 감싸주는 그런 어른들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기 마련이고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실수도 하기 마련입니다. 그 순간은 그것이 큰 잘못으로 보일지 몰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진짜 별 거 아닌 경우가 많지요. 부부싸움도 안 그렇던가요. 부부싸움도 알고 보면 아주 사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싸움이 심각해지곤 언쟁도 격렬해지지만 그 순간을 조금만 지나도 우리가 왜 그런 거 가지고 싸웠을까 하고 후회되지 않던가요. 괜히 상대방에게 미안하고, 미안하지만 미안하단 말도 쉽게 나오지 않고. 그 무슨 자존심이라고. 


나이가 들면 그냥 넉넉해져야 합니다. 상대방 허물이 보여도 못 본 척하는 겁니다. 이쪽에서 상대방의 허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적하면 아무런 감정의 손상이 없이 고치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답니다. 그 지적을 듣는 사람은 대부분 기분 나빠하고 앞으로 만날 일이 없을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상대방 허물에 대해 관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에게 충고하려고 마음 먹었으면 다시는 안 볼 수 있음을 각오하고 신중하게 충고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충고를 아예 하지도 마세요. 그냥 상대방을 좋게 좋게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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