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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23. 2023

자네 나이도 만만찮아

지인들과 오랜만에 식당에서 만나 맛있게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면서 회포를 풀어 봅니다. 흔히 번개 모임이라고 하지요. 누군가 보고 싶어 '번개'를 치면 당사자가 그날 식사값을 내야 하는 부담을 없애기 위해 아예 각자 내는 '더치페이'로 하자고 묵시적 동의를 했었지요. 그렇게 해놓고도 좋은 일이 있는 사람이 전체 밥값을 내는 경우도 간간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자주 보자고 약속했지만 막상 닥쳐 보니 그렇게 잘 안 되더군요. 


식사를 하면서도 시끌벅적했는데, 술을 함께 마시면서도 말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다들 하고픈 말이 그렇게나 많았을까요. 아직은 건강하게 살 만한가 봅니다. 현직에 있을 때 제대로 누리지 못한 여러 가지를 마음껏 해볼 수 있어서 좋다고 누군가가 말할 때 우린 '부럽다'는 말을 연신 날렸습니다. 저를 비롯한 몇 사람은 그렇게 여러 가지를 마음껏 못해서 진짜로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저 같은 경우 올해부터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수개 월이 지나도 아직 노래 한 곡을 제대로 연주를 못하고 있으니 지지리도 재주가 없는 것이지요. 색소폰을 함께 배우는 사람들이 '시간이 말해준다.'라고 격려하지만 제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할 지경입니다. ㅎㅎ.


한 친구는 퇴직 후 곧장 바다로 달려가 윈드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약초식물 관련 자격증에 목공도 공부하고 있답니다. 벌써 작품 하나를 만들어 팔았다고 자랑합니다. 정말 재주가 좋은 사람이지요. 또 한 사람은 퇴직 오래 전부터 야산을 하나 구입하여 소나무를 대량으로 키우기 시작하여 요샌 수입이 쏠쏠하다고 하네요. 다들 진짜 대단하네요. 전 작년에 퇴직하고 아직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데, 그들의 자랑거리를 자꾸 들으니 슬슬 불편해집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에 없는 미소를 짓다가 우연히 거울을 보니 제 자신이 참 묘하게 웃고 있더군요. 그 친구들도 눈치를 챘겠지요. 


제가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어 어색한 웃음을 보내며 자리가 파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전체 분위기를 잘 만드는 한 친구가 저를 화제에 올립니다.


 '책을 많이 읽어 인문학 소양이 깊다. 전자책도 쓸 정도로 실력이 있다. 뭐니 뮈니 해도 우리 나이엔 건강이 최고인데, 자네는 건강 하나는 우리들 중 최고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할 만하지 않나. 아이고 머리숱은 왜 이리 풍성하지. 흰 머리가 많긴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않네요. 건강이 중요한 것 맞는데, 지금 이 상황에선 왠지 칭찬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어색해집니다. 어울리지 않은 미소만 지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냥 가만히나 있지, 그걸 전체 대화의 구색을 맞춘다고 칭찬이랍시고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 먹은 값을 하는가 봅니다. 매사에 예민해지고 쪼잔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런 마음을 밝히진 않았습니다. 다시 술 한 잔씩 동시에 마십니다. 새로운 화제가 오릅니다. 이번엔 자식 이야기가 나오고, 부인에 결국 가족 이야기까지 많이도 나옵니다. 


한 친구가 말합니다. 


"우리 너무 기죽지 마. 이제 겨우 60을 넘겼어. 옛날에야 환갑이라고 떠들썩하니 잔치도 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 60이라고 해도 옛날로 말하면 70%로 곱하면 48살 건강 나이라고 하더라.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자신감을 갖고 하고픈 것 있으면 시도해 보는 것도 좋잖아.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들처럼 큰 고생을 하지 않아서 우리들 마음을 잘 몰라. 그러니 그 아~들에게 기대할 것도 없고, 믿지도 마. 내가 번 돈 마음껏 쓰고 가는 거야. 죽고 나면 자식들이 뭘 어떻게 하든 알아서 하니까 그것까지 걱정할 필요 없다 아이가."


그가 말하는 대강은 지당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모두 맞다고 여기기엔 좀 그렇대요. 이제 60을 갓 넘긴 제 삶을 바라볼 때 그래도 역시 이 나이는 결코 적지 않지요. 그래도 60년이란 긴 세월 살아온 인생인데, 그 인생을 지탱해 준 육체가 젊은 세대들의 그것처럼 신선할 리가 없잖아요. 아무리 우리가 관리한다고 노력하지만, 60이란 나이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한 마디 합니다. 


"그렇게 너무 자신만만하게 생각하지 말. 자네나 우리나 이 나이 만만찮아. 내일 당장 불러도 억울할 필요가 없는 나이야. 그래서 겸손해야 돼. 젊은 친구들보고 우리를 이해해 주니 마니 할 것도 없어. 우리가 먼저 그들을 이해해 주면 모든 갈등이 사라져. 그리고 우리 젊은 아~들 한번 생각해 봐. 그들의 현재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가를. 그래도 우린 국가 경제 수준이 지금보다 낮아도 취직할 때 지금보다 훨씬 쉽게 찾아갔잖아. 그런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결코 그렇지 않거든. 그들도 진짜 힘들게 버티고 있다고. 우리 나이는 그저 그들을 이해해 주고 그들의 힘든 것을 도와 주어야 할 나이야. 그리고 우리 스스로 즐겨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갑자기 너무 잘난 척해서 미안하네. 이만 끝. 감사합니다."


이 사람은 평소에 말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길게 발언하여 우리들 모두에게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멋진 말이었습니다. 왜 저는 그 순간에 그런 멋진 말을 하지 못했을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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