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들 전원에게 부왕을 향해 화살을 쏘게 하고, 여태후를 희롱하다
선우(單于)는 흉노제국의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따르면, 선우는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의 약칭이며, 탱리는 하늘, 고도는 아들, 선우는 광대함을 뜻한다.
《漢書·匈奴傳》。“撐犁”,匈奴語意爲“天”, “孤塗”意爲“子”, “單于”意爲“廣大”
즉, '위대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이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불렀던 것과 흡사하다. 흉노족들도 자신의 통치자를 ‘하늘의 아들’로 인식하면서 황제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흉노 역사에 등장하는 역대 선우 중 가장 큰 업적을 세운 선우는 묵돌선우[冒頓單于]이다. 그의 이름인 "묵돌(冒頓)"은 "모돈", "묵특" 등으로도 읽을 수 있다. 몇몇 기록에서는 "묵독(墨毒)", "묵돌(墨突)"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몽골식 명칭은 바타르인데, 바타르란 몽골어로 "영웅", "용사"라는 뜻이다. 묵돌선우는 남쪽으로는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군대를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내어 매년 공물을 받았으며, 동쪽으로는 동호를 격파하였고, 서쪽으로는 월지국을 토벌하여, 동서에 이르는 광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하였다.
흉노의 초대 황제 두만 선우에게는 묵돌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 후에 선우가 총애하는 다른 연지(閼氏, 후비)가 낳은 막내아들을 낳자 선우는 묵돌을 폐하고 막내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속셈으로 묵돌을 월지국으로 인질로 보냈다. 그리고 묵돌이 월지국의 인질로 있는 동안에 두만 선우는 급거 월지를 습격했다. 월지에서는 묵돌을 죽이려고 했으나 묵돌은 좋은 말을 훔쳐 도망갔다. 두만선우는 그 용감함에 감동하여 묵돌을 1만 기의 장수로 삼았다. 묵돌은 소리를 내는 명적(鳴鏑)을 만들어 부하에게 말타고 활쏘는 훈련을 실시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명적을 쏘거든 다 같이 그곳을 쏘아라. 그대로 쏘지 않는 자는 목을 베어 버리겠다.”
鳴鏑所射而不悉射者, 斬之.
나아가서 새와 짐승을 사냥할 때 명적으로 쏘아 맞힌 것을 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그 뒤 묵돌은 명적으로 자신의 말을 쏘았다. 좌우에 있던 자 중 차마 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들이 있었다. 묵돌은 그 자리에서 그들의 목을 베었다. 묵돌은 얼마 후에 이번에는 애처(愛妻)를 쏘았다. 이번엔 사람을 그그것도 묵돌의 애첩을 활로 쏘게 하다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겁이 나서 감히 쏘려고 하지 못했다. 묵돌은 또다시 그들을 모두 목베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묵돌은 사냥을 나가서 명적으로 부왕 두만선우의 애마(愛馬)를 쏘았는데 좌우에 있던 자들은 모두 그것을 쏘았다. 머뭇거리고 활을 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것이란 학습효과가 단단히 생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묵돌은 종자 모두 뜻대로 사용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아버지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을 갔을 때, 그는 명적으로 두만을 쏘았다. 좌우에 있던 자도 모두 이에 따라 두만 선우를 쏘았다. 묵돌은 마침내 자기의 계모와 이복동생들 그리고 복종치 않는 대신들을 차례로 죽이고 자립하여 선우가 되었다.
묵돌 선우가 처음 즉위했을 때 동호(東胡)의 세력이 강성했다. 묵돌이 자기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들은 동호는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두만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돌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사기』 권110 「흉노전(匈奴傳)」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온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물인즉 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묵돌이 말했다.
“이웃 나라가 청한 것인데,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결국 결국 천리마를 동호에 보내주었다.
얼마 뒤에는 동호는 묵돌이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사자를 보냈다. 이번에는 선우의 연지 중에 한 사람을 달라고 청했다. 연지는 선우의 후비다. 여기서 후비는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후궁일 것이다. 그래도 너무나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그런데 묵돌이 또 좌우 신하들에 물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동호가 무례하게도 감히 연지를 요구하다니, 즉시 토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묵돌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이웃나라에서 부탁하는데 그까짓 여자 하나를 아끼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총애하던 연지 한 사람을 골라 동호에게 보내주었다.
동호가 더욱 기고만장하여 서쪽으로 침략해 왔다. 흉노와의 사이에는 버려졌던 불모의 땅이 있었다. 천 리 이상에 걸쳐 주민이 없었고, 양국은 각각 그 끝에 위치하여 그 사이는 불모의 버려진 땅이었다. 동호에서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이렇게 말했다.
“흉노와 우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불모의 땅에 흉노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 쪽이 그 땅을 소유하고 싶소.”
묵돌이 군신에게 의견을 묻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땅은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그러자 묵돌은 대단히 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토지는 국가의 기본이다. 어찌 토지를 줄 수 있겠는가?”
地者, 國之本也, 柰何予之!
그러면서 주어도 좋다고 말한 무리를 모두 목을 베어 버렸다. 묵돌은 말 위에 올라 나라 안에 명령을 내렸다.
“나보다 늦는 자는 모두 목을 베어버리겠다.”
그리고는 마침내 동쪽에 있는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묵돌을 무시하여 방비하지 않고 있었다. 몇 차례 요구를 했지만, 묵돌이 전혀 거부하지 않고 들어주었기에 방심한 것이다. 더욱이 연지도 보내 준 묵돌이 아닌다. 이건 모두 묵돌의 큰그림에서 나온 계략이었다.
묵돌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치자마자 동호를 깨뜨리고 왕을 잡아서 죽인 다음 백성과 가축을 약탈했다. 그리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서쪽의 월지[月氏]를 쳐서 패주시키고, 남쪽으로 하남의 누번·백양(白羊) 등 두 왕국을 병합했으며, 진(秦)나라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의 땅을 차례로 다시 수중에 넣었다.
이어서 묵돌선우가 한고조 유방의 군대를 격파하여 7일 동안 평성 백등산에서 포위한 사건이 있었다.
초패왕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 통일을 이룬 한고조 유방은 측근인 한왕 신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 토벌을 명했다. 그러나 흉노 토벌이 어렵다 생각한 그는 화평을 시도했고 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흉노에 투항해 버렸다. 묵돌은 기원전 200년 그의 인도를 받아 40만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해 들어가 현재의 산서성 동쪽의 평성에 이르렀다.
묵돌은 일부러 살찐 소와 말을 감추고 노약자와 마른 가축 등을 보이게 하여 스스로를 약해 보이도록 꾸몄다.
철저하게 상대를 속이는 전략을 편 것이다. B.C 200년, 한고조 유방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오자, 묵돌 또한 40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한나라 군사들을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해버렸다. 한고조는 10만의 대군을 상실하고 포위됐다. 한고조의 군대는 7일 동안이나 본진과 단절되어 식량을 보급받지 못했다.
이에 한고조는 진평의 계책에 따라 몰래 사자를 흉노의 왕비에게 보내 고급 모피 외투를 뇌물로 보냈다. 흉노의 왕비는 묵돌 선우를 설득한다. 두 나라 임금은 서로 곤궁한 처지로 몰아넣으면 안 되고 지금 흉노가 한나라 땅을 얻는다고 해도 결국 그곳에 살 수도 없다며 부디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에 묵돌 선우는 연지의 말을 받아들여 포위망의 일부를 풀어주었고 한고조는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B.C198년 한나라는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게 되었다.
한고조 유방이 세상을 떠나고 여후(呂后)가 권력을 잡자 B.C 192년에 묵돌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에서 성장하였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이젠 중원에 가서 놀고 싶소. 지금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을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도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떻겠소?”
孤僨之君,生於沮澤之中,長於平野牛馬之域.數至邊境,願遊中國.陛下獨立,孤僨獨居,兩主不樂,無以自虞.願以所有,易其所無.
너무나도 노골적인 성희롱에 가까운 이 편지로 인해 당연히 한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여후는 분노했다. 초한 쟁패 시절 식솔을 이끌고 천하를 방랑하던 여후가 보통 성질이 아니었다. 한고조 사후 2대 황제인 효제가 제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자는 여후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노골적인 성희롱 편지를 받았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즉시 흉노 정벌군을 편성하려 했다. 이때 번쾌가 나서서 10만의 군대만 주면 흉노를 쓸어버리겠다며 큰소리쳤다. 번쾌는 한고조 유방의 처제였다. 여후의 여동생 여수가 바로 번쾌의 아내이다. 번쾌가 젊은 날 개백정 출신이지만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런 배경 하에서 조정의 신하들 대부분이 여후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권력자 여후가 분노하고 있는 상태에서 냉정하게 현실을 제시하며 여후를 달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수 계포가 나서서 강력히 말한다.
"번쾌를 목베시옵소서. 고황제조차 32만 병력과 장수들을 이끌고 원정했지만 7일 동안 포위되어 겨우 살아났습니다, 당시 번쾌는 상장군이었는데도 고황제가 포위된 것을 뚫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번쾌 따위가 10맘 병력으로 혼자서 어떻게 한단 말이옵니까? 지금 번쾌는 고작 태후께 아첨하기 위해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고 천하를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진나라가 진승에게 반란의 빌미를 준 것이 흉노에게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며 여전히 그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도 저런 망언을 하니 즉시 목을 베어야 합니다.“
계포가 유방의 평성 치욕을 언급하면서 번쾌를 직설적으로 비판자자. 여후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생각을 철회한다. 대신에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낸다.
“선우가 폐읍(弊邑)을 잊지 않고 이렇게 서신을 보내니 폐읍(弊邑)은 몹시 송구하올 뿐입니다. 물러나 제 자신을 생각하면 연로하고 기력은 쇠하여 머리카락과 이는 빠지고 행보(行步)하는 것도 도를 잃었습니다. 그러니 선우께서 그릇된 말을 듣고 스스로를 더럽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폐읍이 죄가 없으니 응당 너그러이 용서바랍니다. 어거(御車) 2승(乘), 말 2사(駟)가 있으니 이를 바쳐 늘 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單于不忘弊邑,賜之以書,弊邑恐懼.退而自圖,年老氣衰,發齒墮落,行步失度.單于過聽,不足以自汙.弊邑無罪,宜在見赦.竊有禦車二乘,馬二駟,以奉常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