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하여 권력을 잡았을 때 매사 겸손하고 조심하라.
우리 시대에 진정 국민을 걱정하고 국민을 위해 나라에 충신하는 관료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현대 정치와 고대 정치 상황을 곧장 비교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겠지만 성심껏 백성과 나라를 위해 노력한 충신의 처신은 지금 들어도 가슴을 뜨겁게 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권력을 잡으면 미친 듯이 국고를 탐내는 자들이 권력의 정상에 서서 우리들 국민을 실망시키는 사례가 정말 많았다. 곽자의 장군 이야기는 어리석은 관료들에게 정말 커다란 귀감이 될 것이다.
더욱이 정권이라도 잡고 권력 핵심부에 들어가면 기고만장하여 눈에 뵈는 것이 없을 정도로 오만방자한 정치인들 정말 많다. 공무원을 노예 부리듯 하고 하대에 막말 고성까지 퍼붓는 국회의원들 꼬락서니를 보라. 자신에겐 참으로 관대하고 남에겐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정치인들이 참으로 무섭다. 눈을 마구 부라리고 악담을 퍼붓는 패악질을 말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권세는 10년 가지 못하고 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10일 이상 붉지 못하는 법이다. 권세를 누릴 때 겸손하고 성실하고 정직해야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구당서』 곽자의전에
天祚土德,實生汾陽。
하늘이 토덕에 복을 내려, 실로 분양왕을 낳았다.
곽자의(郭子儀, 697년~781년)는 중국 당(唐) 현종(玄宗)부터 숙종(肅宗), 대종(代宗), 덕종(德宗)에 이르는 4대를 섬겼으며, 안사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우고 이후로도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냈다. 성당(盛唐)〜중당(中唐) 시기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그의 손녀는 훗날 헌종(憲宗)의 황후가 되기도 했다.
남들이 모함을 해도 개의치 않고 귀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조국이 부르면 언제나 달려가 국가를 패망에서 구해내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황제를 능가할 수 있는 정도의 권력을 쥘 수 있었지만 결코 그렇게 않았으며, 항상 겸손과 성실로 일관하여 백성과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그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눈앞의 현실만 보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여러 상황을 깊이 파악하여 자신과 가정 나아가 민족과 국가에 헌신한 곽자의 장군의 현명한 처신을 생각해 본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권력을 남용하여 결국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많은 현실을 자주 목도하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나라 현종 초기는 개원지치라고 할 정도로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런데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하고 국사를 소홀히 하게 되자 거대한 당 제국에도 멸망의 조짐이 보였다. 관료들의 권력 다툼과 부패, 지방 군벌들의 봉기, 소작농의 몰락, 국경 너무 북방 유목 민족의 잦은 침입이 잦아지면서 당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다. 이렇게 열악한 현실에서 끝까지 충성을 다하여 후세에 커다란 귀감이 된 인물에 장군 곽자의(郭子儀)가 있었다.
곽자의가 남북조 당시 북조의 관료 집안 출신으로 당제국의 무관으로 하곡 일대 변경군 사령관으로 출사하고 있을 때, 현종은 중국 4대 미인 중의 하나인 양귀비에 빠져 국정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저 유명한 안록산의 반군 17만 명은 당시 당제국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이 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반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호전적이고 전투력이 뛰어난 북방 유목민 용병을 맞아 곽자의는 조정의 지원도 전혀 받지 못한 상황에서 1만 여의 소수 군대를 가지고 대적하게 된다.
당시 현종이나 중앙 권력은 지방에서 성장하는 군벌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도 없었다. 그런제 곽자의는 그런 열악한 현실에서 장안을 기습하여 안녹산의 군대를 양쪽으로 쪼개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대담무쌍한 전술을 펼치고 매복과 기습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당시 제국은 현종에 이어 숙종, 대종으로 이어지는데, 훗날 대종이 되는 황태자 광평왕 이예의 휘하에서 곽자의가 부원수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부대를 이끌어 연전 연승하여 공을 세웠다. 게다가 안록산의 반군의 요청에 따라 쳐들어온 위구르의 15만 대군을 상대로 정면승부보다 산악지대로 유인해 기병을 무력화시키는 신출귀몰한 기발한 전술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당시 조정으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현실에서 곽자의 군대는 조급하게 편성되었고, 그나마 전투에 필수적인 기병도 궁수병도 거의 없는 농민 중심의 보병 부대였다. 이렇게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부대를 이끌고 기병 중심의 기동력이 탁월한 적을 대적하는 전술이 훌륭했다. 곽자의 부대는 전투에 임할 때 일반적인 진형을 전개하지 않고 밀집형으로 적 기병을 대적하였는데 그가 항상 병사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싸웠기 때문에 끝까지 대형을 이루어 승리하게 된다.
지휘관이 부대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부하들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환관 어조은이 곽자의의 성장을 질투하여 임금에게 곽자의를 음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내시인 환관이 국정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당제국의 쇠퇴를 재촉하게 된 것이다. 숙종이 어자은의 음해를 믿고 벼슬을 거두자, 곽자의는 두말없이 어명에 순순히 따고 귀향하게 된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국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곽자의가 귀향 생활 중에 다시 서강족의 난이 일어나자 나라에서 곽자의를 불렀다. 그런데 곽자의가 서강족의 난을 완전히 진압하자 임금이 그의 병권을 빼앗아 버린다.
곽자의는 황제의 인사 조치에 일언반구도 없이 또 다시 고향 마을로 낙향한다. 당시 전국의 통제권을 상실한 당제국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티베트 계 혼혈인 복고회은이었다. 그는 북방 국경 너머 위구르에서 돌궐까지 아우르는 세력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당제국에 대항하였다. 이때 곽자의가 대장군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으나 안타깝게도 조정에서 병력이나 군비로 지원할 수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곽자의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두 달만에 7만 명의 군대를 급조하여 편성한 뒤 여러 군벌을 제압한 뒤 드디어 최대 세력인 복고회은 반란군 연합 40만과 대적하였다.
병력이나 후방 보급 그리고 주위의 지원이 거의 없는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곽자의는 불필요한 소모전을 피해 때를 기다렸다, 조정에서는 곽자의의 의도나 전선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황제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곽자의를 비방하기도 했다. 곽자의는 임금과 조정에 자신의 군대를 믿어주면 좋겠다고 상주해야 할 정도였다. 여러 지역에서 빼앗은 물품이 너무 많아 부대의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 반란군의 약점을 간파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간계로 적을 섬멸하게 된다.
숙종의 뒤를 이은 대종이 곽자의를 상부(尙父)로 칭하고 사부로 삼아 상서렴을 임명하자 그는 겸손의 말로 고사한다. 또 곽자의가 영주로 출격하였을 때 어조은이 자객을 보내 곽자의 부친의 묘를 헐었을 때, 대종을 비롯한 군신 모두가 곽자의의 보복을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곽자의는 자신의 불충의 탓으로 돌린다.
“제가 전쟁터를 오가면서 부하들이 숱하게 무덤들을 파헤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 부친의 묘가 파헤쳐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하늘의 뜻이고 인과응보라 생각합니다. 제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대종도, 어조은과 정원진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당하는 어조은의 음해에 대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곽자의는 보복도 하지 않고 자기 탓으로 돌려 자기 수양의 기회로 삼는 정말 빼어난 인격의 소유자였다.
세월이 흘러 대종의 딸 승평 공주가 곽자의의 며느리가 되어 아들 곽애와 혼인하게 되었다. 승평공주는 황족으로 성정이 온순하지 못했다. 어느 날 곽자의의 집에 잔치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모였는데, 오직 승평공주만 놀러가서 참석하지 않았다. 당연히 곽애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결국 둘은 그날 밤 부부싸움을 심하게 했다. 여기서 승평공주가 ”당신 내 아버지가 대당제국의 황제인데 이렇게 할거야.“라는 식의 말을 하자 대노한 곽애가 “당신 아버지가 천자라고 해서 너무 우쭐대지 마시오. 우리 아버님은 마음막 먹었으면 천자가 될 수도 잇었지만, 그깟 천자 자리 줘도 안 가지시는 분이오.”라고 말하였다. 홧김에 말한 것이지만 대역죄에 해당되도 할 말 없을 실언이었다. 승평공주는 대종에게 이를 일러바쳤는데, 대종은 그저 “네 남편 말이 맞다.”라고 돌려보낸다.
설령 그 발언이 타당하다고 해도 황제의 지위를 논한다는 자체가 철저히 금기시된 당대를 고려해 볼 때 곽애를 비롯한 집안 전체가 멸족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곽자의는 기겁해서 아들을 데리고 가 아들을 감금하고 대죄(待罪)했는데, 이때 대종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속담에 ‘바보가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니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지 않소. 不痴不聾 不作家翁.”
가장(家長)이 집안을 평화롭게 다스리려면 보아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해야 한다는 뜻의 속담이다. 대종이 곽자의를 존중하고 그의 집안에 공주를 시집보낼 정도를 감안하더라도 대종이 그 상황을 묵인한 것은 대단한 처신이었다.
가장 하이라이트는 곽자의가 공을 인정받아 분양왕(汾陽王)에 봉했던 당시의 일화이다. 왕부(王府)를 갖게 되었는데 그는 이 왕부를 개방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과 딸이 화장을 하는데, 곽자의가 직접 시중을 드는 모습이 알려져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러자 부친의 체면이 상할 것을 걱정한 아들들이 왕부를 폐쇄하자고 건의하였을 때 곽자의는
‘왕부 개방은 허영이 아닌 우리 가문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왕부를 소유하고 개방할 정도의 부귀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 부귀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부귀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어 있다. 언젠가 이 지위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왕부를 개방하지 않고 시중 사람들의 말들이 싫다고 폐쇄하면 반드시 원성을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많은 가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외부와 왕래를 끊을 수 없다.’고 답한다.
곽자의의 현명한 처신 사례가 또 있다.
곽자의가 병에 걸렸을 때 대신 노기가 병문안을 왔다. 노기는 영리하고 유능했다. 하지만 용모가 추해서 그를 보는 사람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곽자의는 노기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모든 집안 식구와 하녀들을 물리고 홀로 노기를 맞았다. 노기가 돌아간 후 가족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곽자의는 다음과 같이 답해다고 한다. “노기는 못생겼지만 속이 음흉한 사람이다. 너희들이 그를 보자마자 웃으면 그는 분명이 원한을 품을 것이다. 훗날 그가 권력을 잡으면 이를 마음속에 간직했다가 분명히 우리 집안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노기의 본모습을 알기에 이를 알고 방지한 것이다.”
이처럼 곽자의는 명장으로 용맹무쌍하였지만 매사에 세밀하면서도 항상 상대를 존중하여 화를 예방할 줄 알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향유하고 있을 때 그 권력에 취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현명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곽자의가 시중 사람들의 놀림이나 소문을 분명히 예상하면서도 그렇게 처신한 것에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곽자의에 관한 영웅적 풍모는 조선왕조실럭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우리 민족의 영웅 李舜臣이 난중일기 한시 중에"恢復思諸葛(중원을 회복하려던 제갈양이 생각나고), 長驅郭子儀(말달리며 위기를 막아내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하는 대목이 있다. 각종 문집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찾아보면 곽자의의 이름이 숱하게 나타난다.
정조 17년 계축(1793) 6월 22일(계미) 기사를 보면
영의정 홍낙성에게 하유하였다. 諭領議政洪樂性曰
“나라에 가장 소중한 것은 정승과 장수이노라. 먼저 장수의 일로 말하겠다. 곽자의(郭子儀)는 복장(福將)이고 이광필(李光弼)은 지장(智將)이었다. 광필의 용병(用兵)은 귀신 같아서 때때로 자의도 따를 수 없었으며 호령이 한 번 내려지면 진중(陣中)에 광채가 더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그러나 벼슬이 한껏 높고 공이 천하를 덮으면서도 일신에 탈이 없고 집안이 온전한 사람으로는 1천 3백 62년 동안 오직 자의 한 사람뿐이었노라. 그래서 지모가 복의 힘을 덮을 수 없음을 비로소 알았노라.
복장(福將)으로서의 곽자의의 면모가 잘 드러난 그림에 <곽분양행락도>가 있다. 그의 생일 연회를 묘사한 작품으로 8폭의 화면 속에 부귀와 공명으로 가득한 한 인물의 행복한 만년을 묘사해 놓았다. 곽자의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 모두 벼슬에 올라 그의 가문은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곽자의는 84세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살아서는 당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죽어서는 그의 부귀영화가 부러운 백성들에 의해 신으로 모셔졌다. 곽분양은 평생 동안 부귀와 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 또한 번창하였으므로 그의 일생은 부귀공명을 누리는 상징으로서 다양한 문학작품과 회화의 주제가 되었다. 아들, 손자들과 함께 무희의 춤을 감상하며 연회를 즐기는 곽분양을 중심으로 화면의 왼편에는 연회에 참석하러 온 손님들을, 오른편에는 부녀와 아이들의 평안한 일상이 담겨있다. 현존하는 작품들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구성과 배치가 유사하며 출품작 역시 곽분양행락도의 형식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이다.
<곽분양행락도>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노년의 분양왕 곽자의(郭子儀, 697-781)가 호화로운 저택에서 가족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조선 후기 회화이다. 그는 무장으로서 성공했고, 무병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 또한 번창하여 세속에서의 복을 마음껏 누린 인물로 꼽힌다. 조선시대 사대부층과 왕실에서 이 같은 부귀와 다복을 소망하며 <곽분양행락도>를 만들어 소장했는데, 특히 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