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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pr 15. 2023

가서 그집 아지매 오라 캐라

평생 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 추억이야기

어느 지인(知人)의 이야기입니다.



마을에서 산고개를 넘어 우리 섬 제일 큰 동네까지 가야 한다. 4km 당시 시골마을에선 십리 길이라 했다. 할아버지는 우리집 형제들 중에 나를 꼭 집어 재 너머 그 항구까지 가끔 심부름을 보냈다. 어린 손녀인 나에게 그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낮에도 왕래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숲속을 지나가야 하는데다가 공동묘지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섬뜩 섬뜩하다. 섬에서 그래도 부잣집에 속하는 우리는 큰 어려움이 없이 자랐다. 하지만 당시 섬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에 치여 참으로 어렵게 살았다. 


학교 가는 길에 그집 아지매에게 말을 전하라는 할아버지 심부름이다. 친구들과 함께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낮에도 숲속을 통과하기 때문에 어둑어둑할 정도다. 우리 7남매가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꼭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친구들과 동네 오빠들 언니들과 모여 그 길을 넘어가니 십리 길이라 해도 금방 간다. 그렇게  고개에 올라서니 저 멀리 항구가 보인다. 이 심부름이 몇 번이나 있었기에 익숙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개에 올랐을 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리막은 한결 쉬웠다. 더욱이 항구가 눈앞에 보이니 길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있제, 니 학교 가는 김에 그집 아지매한데 여기 왔다 가라 캐라. 알았제. 그라고 학교 잘 다녀오너래이."


나 어렸을 때 우리집은 마을에서도 꽤 부자였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마을이었지만 부유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거의 모르고  자랐다. 할아버지가 워낙 부지런하게 살림을 모았기에 아버지 어머니를 넘어 우리 대에까지 와서도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우리 7남매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뭍으로 넘어와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도 컷겠지만 실질적으로 할아버지의 덕이 크다. 할아버지는 남에게 많이 베풀었다. 겨울이 되면 타 동네 장정들이 우리 마을에 일하러 온 적이 많다. 그때마다 커다란 가마솥에 고구마 배때기 죽을 가득 쑤어놓고 그분들이 가져온 차가운 밥에 말아서 먹도록 배려해 주었다. 우리집에 일하러 온 것도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그만큼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많으셨다. 그분들 그렇게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뜨뜻한 고구마 배때기 죽을 가득 먹으면서 너무나 고마워하셨고,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로 더 권하셨다. 


어머니가 통영으로 배타고 나가서 제사 용품을 사러갈 때도 충분하게 여유있게 돈을 주셨다.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도 대단했다. 제사용품 비용에 어머니 교통비로 충분하게 더 주셨다고 한다. 행여 배를 놓치거나 사정이 생겨 돈이 떨어지면 낭패가 될까 봐 그러셨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더 귀하게 생각했을 정도로 할아버지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어머니가 같은 방에 기거하면서 병구완을 할 정도였다. 부자들 중에는 인색한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할아버지는 전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우리 가족만 챙긴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타지 사람들도 정말 잘 대해 주셨다. 


재 너머 항구 마을에 있는 그집 아지매가 우리집과 어떤 관계였는지, 왜 그집을 챙겨야 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해마다 농사철이 끝날 무렵 그집 아지매는 아들 한 명을 데리고 우리집에 와서 할아버지가 건네 주는 보리, 고구마를 비롯한 온갖 농산물을 받아갔다. 그집 아지매는 할아버지께 크게 절하고, 아들 어깨엔 무거운 농산물을 올렸다. 하기야 그집만 그랬으랴. 어려운 사람이 있다하면 할아버지는 절대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었다. 그 덕에 지금 아버지는 80대 후반인데도 할아버지 후광으로 지역 유지로 지내고 있다. 요즘도 가끔 고향 마을에 가면 할아버지의 생전 행적을 칭송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 형제들은 단합도 잘 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에 익숙하다. 


한번은 남동생이 새로 지은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가는데, 4억 정도가 부족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실제 돈이 부족했다기도다 이사 오는 사람과 이사 가는 사람의 사정으로 일시적으로 그 돈이 필요했다. 집을 산 사람이 돈을 지불했으면 별 문제가 없었다. 열흘 상간에 거액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나도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남동생 얼굴만 보고 걱정만 했다. 그런데 남동생이 이곳 저곳 전화를 해서 불과 30분 만에 4억을 빌렸다. 물론 아파트를 판매한 돈으로 일주일 만에 갚았지만. 우리 남동생이 그만큼 지인들에게 신뢰를 쌓아서 그랬겠지만 할아버지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따랐던 영향도 크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우리 남동생은 할아버지와 너무나 흡사할 정도로 주위 사람들에 베풀어 신망이 두텁다. 




할아버지도, 그집 아지매도 이젠 모두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베풀었던 온정은 부자들이 해야 할 선행이 아니었을까. 그집 아지매는 당시 할아버지가 주시는 식량을 받아 머리에 이고 아들과 함께 고갯길을 넘으면서 그렇게나 고마워하셨다고 한다. 고개를 넘어가면서 아지매가 크게 울었나 보다. 그집 아들이 고개 마루에 바위에 잠시 앉아 쉴 때 왜 울었는지 물었더니 고마운 마음에 목이 매였다고 답하더란다. 보통은 가난에 서러움에 북받쳐 울었겠지만 그집 아지매는 진짜 고마워서 울었고, 아들에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세상 천지에 장씨네 할아버지만큼 인정 있는 사림이 있겠나. 우리가 가까운 친척도 아닌데 해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 곡식을 주시니 그 은혜 절대 잊으만 안 된다. 지금 이렇게 넘어가는 고갯길 그집 어르신만 생각하면 힘든 기 뭐꼬, 다리도 한 개도 안 아프다. 나중에 니 이 은혜 절대 잊어뿌마 안 된다."


내가 그말을 어떻게 들었겠는가. 그집 아들이 학교 동창이라 세월이 흘러 그집 아지매가 세상을 버리고 나서 만났을 때 전해 준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누군가에 베풀었다고 어디 가서 자랑을 하거나 보답을 절대로 바라지 않으셨다. 나야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는 것이 일상사라 무덤덤하게 생각했지만, 그집 아지매와 그 동창은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우리 남매가 섬을 떠나 뭍으로 나가 생활할 때도 할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챙겼다. 손자가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면 통장과 함께 선물도 주었다. 손녀가 좋은 일이 생기면 반드시 용돈을 주어 격려해 주었다. 손녀들에게도 통장을 쥐어 준 것은 마찬가지다. 일정 액을 입금한 통장을 주시면서 


"앞으로 여기를 채우는 것은 너희들 몫이다. 알았제."


지금이야 할아버지가 사둔 논밭을 일부 정리하였지만 그래도 고향 마을에 홀로 남은 아버지가 상당 부분 소유하고 있다. 연세가 많아 농사를 많이 짓지는 못하지만 우리 남매들이 날을 맞춰 거기에 가서 고구마를 함께 심거나 음식을 가득 해가지고 가서 마을 회관에 들여놓으면 아버지는 정말 흐뭇해 하신다. 동네 분들도 우리집에 대한 좋은 기억을 놓고 연신 할아버지 칭송을 들려주신다. 


항구에 있는 그집 아지매는 먼 친척이고 살림이 옹색하여 할아버지가 진심으로 도우셨을 것이다. 한 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그렿게 아지매와 그집 아들이 고개를 넘어와서 농산물을 가득 받다 가셨다. 오늘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오른다. 할아버지 세대에 부자가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었다는 말은 참으로 귀한 일이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잘 생긴 외모만큼이나 어려운 사람에겐 하해같은 마음을 주셨다. 참으로 멋진 우리 할아버지가 비오는 날 갑자기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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