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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05. 2023

보임안서(報任安書)

사마천이 임안에게 보내는 답서

        

사마천은 B.C 97년에 궁형(宮刑)에 처해졌지만, 끔찍한 치욕형을 내린 무제에게 그후 재능을 인정받아 대사면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B.C 96년 출옥 후 중서알자령(中書謁者令)에 임명되었다. 한 무제의 사면으로 관직에 복귀하였지만, 사마천의 심중은 기쁨이나 자긍심보다 궁형에 따른 분통을 오롯이 간직한 채 『사기』 저술에 전념하였다. 42세부터 56세까지 장장 15년간 써내려 간 『사기』 내용이 궁형을 받은 시기를 경계로 전후 서술 내용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궁형 이전에는 한 제국과 한무제를 자부심과 추앙의 대상으로 상정하여 긍정적으로 보았다면, 궁형 이후에는 역사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게 된다. 궁형을 겪으면서 현실을 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보임안서는 친구인 익주자사 임안(任安)에게서 받은 편지에 대해 정화 2년 (B.C 91년)에 보낸 답장이다. 예전에 임안이 보낸 편지에 대해      


‘소경께서는 저에게 훌륭한 인물을 밀어주라고 충고하시지만, 그와 같은 일은 저의 속뜻과는 어긋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     


라고 답하는 내용과 함께 사마천의 현재 심정을 통절하게 밝히고 있다. 실제 임안이 편지를 보냈을 때 사마천이 곧장 답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인재 추천 제안이 임안 자신을 황제에게 추천해달라는 청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사마천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정화 2년(B.C 91년)에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의 반란―이른바 무고(巫蠱)의 난―이 일어나 익주자사에서 호북군사자로 전임된 임안이 사건에 말려들어 하옥되고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보임안서는 임안이 처형되기 직전에 쓴 글이며 사마천이 임안의 이전 편지를 받고 2년 만에 쓴 답서다.       

    

보임안서는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읽어도 감동을 받을 만큼 뛰어난 문장이다. 문장 곳곳에 사마천의 가치관이 오롯이 반영되어 있으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충실하게 답하고 있다.     


“가령 내가 법에 의거하여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저를 능히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으로 기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지혜도 없이, 죄가 극에 달해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말았다고 여길 것이라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보임안서」는 임안의 편지에 답장을 하는 형식의 서간문이다. 사마천이 사형을 선고받고, 한창 집필 중이던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고자 했고, ‘궁형’을 자청해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 편지에는 『사기』의 집필 배경을 비롯하여, 사마천의 생사관, 시대에 대한 인식, 역사 기록의 의지 등에 대한 사마천의 다양한 견해가 들어 있다.     

      

임안은 한 무제 때 파격적으로 기용되어 익주자사에 임명되지만, B.C 91년 태자 유거(劉據)의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마천과 임안은 두터운 교분이 있어 사형을 앞둔 임안에게 사마천은 자신의 뼈아픈 심정을 생생하게 전하면서 임안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편지를 보냈으니, 「보임안서」가 바로 그것이다.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극형을 받고 그 수치심과 모욕을 참으면서 살아가려고 결심한 이유가 있었다. 사마천이 충분히 자결할 수 있었다. 조정 관리라면 궁형이라는 수치를 겪기보다 깨끗하게 자결하는 것이 훨씬 나았고, 실제 당시의 관례였다. 대부분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그렇게 구차한 삶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살아남았다. 왜 그랬을까.  

         

사마천은 태사령이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 시에 『통사』를 기록하라고 유언하였고, 이에 『사기』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친에 이어 사관의 직책을 갖고 있었던 사마천에게 역사서를 꼭 완성하라는 부친의 유언을 지키고자, 지극히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5년간이란 긴 세월 동안 『사기』를 썼고, 그 역사서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역사서를 써내려 갔다. 그리하여 불후의 명저로 꼽히는 『사기』 130여 권이 완성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보다 더 치욕적인 형벌을 자청했던 사마천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밝혀 놓았다. 아마도 구구절절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이렇게 말하였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 느낀 치욕이 얼마나 컸기에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것을 토로했을까. 그런데 궁형을 당하기 전에 그런 치욕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분명히 성기를 절단당하는 형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설령 산다고 해도 산목숨이 아닌 그저 살아 있는 시체에 불과함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를 누르고 울분을 참고 옥에 갇혀 궁형을 감수한 것은 역사서를 완성하여 자신이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을 후세에 알리겠다는 열망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선 사마천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게 수치스런 일을 겪어가면서까지 구차하게 목숨을을 연장하여 역사서를 남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사마천과 같은 위대한 인물은 세상을 보는 시각조차 우리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생에 대한 관점도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차원에서 전개된다.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역사서 『사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사기』 「흉노열전」에 ‘이릉의 화’와 연관된 사건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 이듬해, 한나라는 이사장군 이광리에게 명해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주천군을 나가 우현왕을 천산(天山)에서 치게 했다. 이사장군은 흉노의 수급과 포로 만여 명을 얻어 돌아오던 도중, 흉노에게 포위를 당해 거의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한나라 군은 열에 예닐곱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한나라는 또 인우장군 공손오에게 명해 서하군(西河郡)을 나가 강노도위와 탁도산(涿涂山)에서 합류하게 했으나 전과는 없었다.    

  

  또 기도위 이릉에게 명해, 보병과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거연 북쪽 1천여 리까지 나가서 치게 했다. 이릉은 선우와 마주쳐 만여 명의 적을 살상했으나 이쪽도 군사와 식량이 거의 다 떨어졌으므로 전투태세를 풀고 돌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흉노에 포위되어 마침내 이릉은 흉노에 항복했고, 그의 군사는 거의 전멸되어 한나라로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4백 명뿐이었다. 선우는 이릉을 귀하게 대우해 그의 딸을 이릉의 아내로 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릉이 흉노에게 어쩔 수 없이 항복하였지만, 한 무제는 이릉의 입장이나 전장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제국 한나라 군이 북방 오랑캐 흉노에 패배했다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크게 격노하였고, 이에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사마천에게 평생 아니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상처가 된 궁형! 그 궁형을 초래한 발단이 바로 이릉의 항복이었다. 실제로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자마자 곧장 조국 한나라를 배반한 것이 아니다.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하고 포로가 된 지 1년쯤이 지났을 때, 무제가 돌연 공손오에게 군사를 주며 흉노를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공손오는 작전에 성공하지 못하고, 이릉이 흉노를 위해 군사 전술을 가르치고 있다는 그릇된 첩보를 가지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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