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엽 Sep 07. 2023

우리 어데 놀러 가꼬

무슨 말이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낮에 색소폰 학원에서 쉬는 시간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80대 남자 선배님이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면서 우리들 입을 아예 틀어막다시피 하면서 당신의 사정을 들려 줍니다. 젊은 시절 군악대 출신으로 180cm 정도의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분입니다. 80대에 그 정도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데, 헬스를 장기간 하면서 근육도 강하게 만들었으니 정말 대단하지요. 평소에는 다들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눌 때 다른 분들의 말씀을 넉넉하고 여유롭게 들어주시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하고픈 말이 많았던지 마구 서두르십니다. 손짓 발짓도 큽니다. 결론은 


'이 나이에 집사람 때문에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되느냐'입니다.


선배님 자제 분이 둘 있었는데 몇 년 전에 큰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둘째 아들 부부는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 부부는 자녀가 없답니다. 그래서 이 선배님 부부는 손주가 없는 상황이지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으니 부모 마음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사모님께서 우울증으로 장기간 고생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좋아지긴 해도 워낙 큰 충격이었을 테지요. 집에 늘 두 분만 계셔서 이 선배님께서 노심초사하며 지낸답니다. 그리고 그 나이에도 특수직 자격증이 있어서 일하러 다닙니다. 경제적으로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데, 문제는 사모님 홀로 집에 계셔서 이 선배님 걱정이 참 많단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만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사모님을 케어합니다. 선배님은 최근에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사모님이 이것을 싫어한 모양입니다. 선배님 입장에선 이제 그 나이에 자신이 마음껏 뭔가 배우면서 생활하고 싶은데 그것마저 통제를 받으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지요. 


색소폰 학원도 이달 말까지 배우고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면서 한탄을 하시네요. 우울증 겪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사모님의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니까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도 하십니다. 그런데 막상 선배님께서 색소폰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하니까 사모님께서 지금까지 배운 것을 그만 두면 '아까워서 우짜노' 하면서 말린답니다. 이건 도대체 어떡하라는 거냐면서 우리들에게 화풀이하는 듯합니다. 물론 큰소리로 진짜 화내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답답한 현재 상황을 우리들에게 들려주면서 본인도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러면서 저에게도 '부인 때문에 고생이 많지요.'라고 슬쩍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저도 집사람이 3년째 코로나 2차 접종 후유증을 앓고 있어서 우울증 겪고 그랬습니다만 그래도 저에게 뭔가 강요하거나 화를 낸 적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자기 몸이 불편하여 짜증은 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간섭한 적은 없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아드님 잃고 그랬으니 우리집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이었겠지요. 선배님께서 뭔가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아도 사모님의 지금 심정을 이해하시면서 좀더 너그럽게 해드리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색소폰 이거 안 배워도 우리 망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자 선배님께서 좀더 마음을 내려놓고, 사모님을 케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니까, 그 선배님께서 미소 띤 얼굴로 저를 가만히 쳐다봅니다. 그리고, 


"그렇겠지요. 내가 스트레스 받을 때 집사람은 오죽 하겠나 싶네."


그리고 화제를 이어나갑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작은 아들 부부가 몇 개월 뒤에 잠깐 방문하는가 봅니다. 어제 낮에 작은 아들이 미국 현지에서 국제 전화로 어머니께 안부도 묻고, 부산에 와서 두어 달 지내다가 돌아갈 예정이라 어딜 여행갔으면 좋겠느냐고 물어 본 모양입니다. 아들 입장에선 부모님 마음을 위로하고 어디 여행이라도 함께 가서 기분도 전환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었겠지요. 이 부부가 스피커 폰으로 아들과 통화를 하는데, 아들은 부드럽고 살갑게 말하는데, 어머니는 불퉁하게 대하더랍니다. 어머니가 통화 중에, 


"니는 자주 연락도 안 하고 그라다가 뭐 새삼스리 지금 어디 여행가자고 그라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올 때 조심해서 오기나 해라. 여행은 무슨 여행! 그런기 지금 뭐가 필요한데. 전화 끊어라. 알았제. 끊어."


라고 쌀쌀하게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이 선배님도 순간 난감했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한국에 오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여행이라도 가면 좋지 않을까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정작 사모님께서는 저리 퉁명스럽게 나오니 순간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이 선배님께서 색소폰으로 가족들에게 들려 줄 노래를 열심히 연습도 하고 그랬는데 말이지요. 아들 부부와 어디 멀리 여행가서 저녁 먹고 테라스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색소폰을 멋지게 연주하는 꿈이 허사가 될 것 같았지요. 그렇다고 다시 미국에 국제전화를 걸어 선은 어떻고 후는 어떻다고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것도 영 궁색하더랍니다. 


실제로 사모님이 전형적인 경상도 분이라 말투가 퉁명스럽고, 표현도 거칠다네요. 아들 며느리와 통화 중에 며느리가 사모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답니다. 오래 전에 사모님께서 아들과 통화 중에


"니 씰데 없는 소리 하지말고 그냥 디비 자라. 끊는다 으잉!"


라고 했는데, 며느리가 '디비'가 뭐냐고 몇 번이라 물어보더랍니다. 그래도 가족끼리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잘 내왔는데, 이번 통화에선 아들이 혹시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선배님께서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아들이 다시 아버지께 전화해서 전혀 걱정하지 마시고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라고 하기에 한 시름 놓았습니다. 아들과 그렇게 퉁명스럽게 통화를 끝낸 사모님께서 돌아보며 이 선배님께  


"여보 아들 오면 우리 어데 여행 가꼬?"








작가의 이전글 그래도 그때가 좋았던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