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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15. 2023

나이가 들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젠가는 낙향할 여기에 섰습니다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아 독서를 하는데, 창문 너머 숲속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참으로 요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란한 풀벌레들 소리가 묘하게 교향악처럼 제 마음을 정말 편하게 해줍니다. 시끄러운데도 평화를 느낄 수 있다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편안하게 앉아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는 것이 진정 감사한 일입니다. 며칠 전 지인이 추천한 강판권 교수의 <나무열전>을 읽으면서 생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저자의 탁월한 한자 지식에도 감탄하지만 우리네 산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지금껏 동양철학이나 동양 사학에 매몰된 독서를 해왔는데 이제 노년에 접어들어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 번역본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화롭고 넉넉한 저녁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전해온 제자의 음성도 감사합니다. 고교 시절 학업에 소홀하여 지금껏 후회가 많이 된다는 솔직한 고백에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아이가 저를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연락을 주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그래도 저와 함께 보낸 학창 시절이 정말 그립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학업에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자책을 하기에 지금부터 자신감을 갖고 다시 힘내길 바란다고 말하는 저 자신이 그냥 부끄럽고 미안하기만 한데도 그 아이는 오히려 저와 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고 말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대신에 사회 생활 능력은 좀 있는 것 같다는 그 아이의 자랑을 들으니 세상 사가 반드시 불공평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최근에 계약 하나를 성사시켜 뿌듯하다면서 자랑하기에 이렇게 성공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다고 전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 시간을 내어 식사라도 대접하겠다는 그 아이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제 인생에 이런 복(福)도 다 있다는 마음에 감사를 느낍니다. 앞으로 천천히 시간을 만들어 보자면서 전화를 끊었지만 저녁 내내 그것을 생각만 해도 고맙더군요. 제가 그 아이에게 결코 잘해 준 것이 없는데 말이지요. 


아하 제가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세상에서 누군가의 성공을 절대로 질투하지 않고 진정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이 둘이 있으니 바로 어머니와 선생님이다."


여기에 아버지도 부모님이니 포함해야 하겠지요.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아 저와 아내에게 은근한 걱정을 주는 우리 아이들 3남매가 각자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주니 감사합니다. 3년째 아내를 제가 케어한다고 미안해 하는 아이들의 전화를 접하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제 삶이 결코 실패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감사해 합니다. 아니 아내와 아이들에게 감사한 일이지요. 어린 시질부터 저와 아내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도를 다해 준 우리집 아이 3남매가 아직까지 부모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써주는 것에 감사합니다. 


사회 여러 모임에서 만나 길고도 긴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오랜 세월 만나면서 친척보다 더 자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제 곁에서 진심으로 저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제 편이 되어주던 순간이 감사합니다. 30년 가까이 되는 어느 모임 같은 경우 그 긴 세월에 매월 한 번은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데, 사소한 언쟁 하나 없이 이렇게 같이 세월을 보내며 행복하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익어간다고 하대요. 


앞으로 더욱 나이가 들어 지금과 달리 노쇠해질 때 본격적으로 외로움을 겪고 신체에 힘든 일이 발생할 때, 손을 뻗으면 다가 올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우리 굳게 약속한 사람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설령 그 약속이 어그러지더라도 지금처럼 서로를 아끼고 이해하며 상대방의 어려움을 헤아려주기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지금처럼 정(情)을 쌓아 긴 시간 누적되면 그때는 서로가 멀리 떨어지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어느 지인의 말씀도 감사하고, 우연히 길가다 만난 사람과 손이라도 덥석 잡고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잠시라도 맥주를 함께 마실 수 있는 이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며 아침 저녁 만날 때 정말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 와서 진심으로 걱정해 줄 때, 사소한 일에도 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 왔을 때, 가끔은 저녁 노을에 싸여 떨어지는 석양을 바바볼 때,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흰구름 사이로 청량한 가을 바다 바람을 온몸으로 맞을 때 저는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해 합니다. 



비단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신도 모르게   "아! 정말 잘 잤다."가 저절로 나올 때, 온몸으로 기지개를 켠 뒤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 너무나도 상쾌한 새벽 공기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올 때, 새벽 산책을 나설 때 길가 이름모를 풀잎 사이에 아침 이슬들이 싱그럽게 맺혀 있을 때, 산새가 풀속에 있다가 사람 기척을 느끼고 후두룩 날아오를 때, 산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어울려 흔들릴 때. 산행 중 꽃이 방긋 웃으며 반겨 줄 때, 새벽 잠에 살며시 들었다가 지나가는 제 발자국 소리르 듣고 눈을 게슴츠레 뜨는 고양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볼 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추억에 젖어 차를 운행하여 시골 추억의 공간에 서서 혼자 그 옛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지을 때, 강변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함께 일했던 그 논밭 어귀에 서서 우리 가족들이 낙동강 강바람을 맞으며 무와 배추 씨앗을 부드러운 밭 흙에 살짝 살짝 발로 짚어 넣어줄 때, 수박밭 원두막에서 여러 가족들이 어울려 점심 밥을 먹으며 반찬을 서로 주고받았던 때, 열 일곱 고1때 우연히 수박밭에서 만나 눈이 맞았던 이웃 여고생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때, 소 대신에 쟁기를 끌며 아버지의 장난에 가볍게 항의하던 때, 여름날 강바닥 모래사장에 가득한 풀밭 사이에 착한 암소를 풀어놓을 때 등등을 떠올리며 감사함을 진하게 느낍니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보니 세상사 제가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 모든 것이 저를  감사함으로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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