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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16. 2023

나이가 들면 이렇게 말해 보세요

결국은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 설득을 잘 한다

토요일 오전 아내 정기 병원 물리 치료를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내의 에피소드 하나를 듣다 보니 병원에 도착했네요. 공문 처리를 놓고 직장 상사를 골탕 먹인 이야기를 신나게 하기에 저와 둘이서 그 상사를 슬쩍 언급하며 낄낄거렸습니다. 지난 달에 아내가 소속된 사무실에 새로 상사가 와서 업무를 지시하는데, 아내가 공문을 한번도 처리하지 않아 잘 모르는 것처럼 일부러 거짓말을 좀 했다면서 그 상사를 애먹였다네요. 그렇게 신나게 이야기를 하던 아내가 차에 내려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가까운 주차장에서 대기하려고 다시 출발하는데, 



갑자기 오래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오래 전 30대 때 이야기입니다. 


서울에 있는 협회에서 담당자가 내려와 성인 인문 독서 및 출판 관련 회의를 하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약 100여 명의 규모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디 가나 그렇지만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는데 혼란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각 단체 대표들과 협회 업무 주무 담당이 예산 책정, 배정, 그리고 출판까지 한꺼번에 회의 석상에서 진행하려 하니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결정된 터라 체계가 없었고, 당일 참석한 각 단체 담당자들은 한 푼이라도 많이 배정받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요. 단체들의 사정이 각양각색이고 전체 예산은 제한적이니 경쟁이 생길 수밖에요. 그리고 협회 본분에서 내려온 담당자가 약간 으스대는 듯한 거만한 자세를 취한 것도 우리들을 조금 불편하게 했지요. 


그러던 중 회의 진행은 제대로 안 되고, 참석사들은 담당 사회자의 통제를 따르지 않으니 사회자가 화가 났겠지요. 그래서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로, 


"나이 먹은 성인인데 이렇게 말을 안 들으니 도저히 안 되겠네. 예산을 한 푼 땡전도 안 줘야  하겠네. 다른 데선 사람들이 아주 정숙하고 통제도 잘 따라주는데 여기 사람들은 참 희한하네. 그냥 다 취소해버릴까 보다."라고 넋두리 비슷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실내 분위기가 그야말로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정말시끌시끌하였지요. 참석자들이 운집한 실내 그중에도 가운데쯤 앉으신 어느 분이 손을 들면서 벌떡 일어나 마이크를 요구합니다. 마이크가 넘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뭐요. 지금 뭐라 캤소? 여기 내려오는 예산이 당신 개인 돈이오. 알라한테도 안 하는 말을 우리한테 그렇게 심하게 한 당신 앞으로 나와보소. 우리를 뭐로 보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데. 내00000 단체에서 온 사람이오. 당신 사과 안 하면 내가 단다이 문제 삼을 끼요."


담당 사회자가 분명 말을 잘못한 것은 사실인데 한 분이 이렇게 거세게 항의하니까 오히려 담당자도 씩씩대면서 자신이 왜 사과해야 하느냐고 도리어 반박합니다. 너무 통제를 안 따라주기에 한 소리 한 것을 가지고 뭐 그리 사납게 나오느냐면서 말입니다. 저도 그 담당자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그분의 사정도 조금은 이해가 된 터라 그쯤에서 대충 서로 사과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또 다른 사람 둘인가 셋인가가 발언하겠노라고 소리치면서 손을 들었지만 더 이상 발언 기회는 주지 않았습니다. 양쪽 다 일리있는 말인데, 자칫 큰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지요. 그렇게 웅성웅성하는데, 한 분이 아주 조용히 점잖게 손을 듭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손을 든 사람이 뭐라고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손만 들었는데, 이번에는 발언 기회를 주네요. 


"이 많은 사람들 구미에 다 맞게 해주는 것도 어렵고, 이렇게 큰 예산을 배정하고 진행하고 사후처리까지 업무 처리하려면 참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생긴 사업 성격상 연초에 없었던 업무가 가중되는 담당자님도 골치 아프고 힘드시겠지요. 여기에 모인 우리들이 그렇다고 본부 통제에 잘 따라주지도 않으니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한 마디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면 혼잣말로 뭐라 할 때 안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담당자님도 전적으로 잘 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당연히 실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서로 아웅다웅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니 이렇게 하입시다. 서로 서로 양보한다 생각하고 담당자님께서 적절하게 사과하시고 업무 이야기로 넘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 잘 해보자고 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 저보다는 한 열 살 이상 선배로 보였는데, 인상도 참 인자하고 음성도 부드러우며 차분했습니다. 나지막하게 자신의 생각을 조금은 길게 말씀하셨는데도 회의에 참가한 대부분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며 경청하고 나중에 발언이 끝나자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담당자가 다시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업무 처리를 진행하면서 진지하게 사과도 하더군요. 다시 한번 큰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씩씩거리며 큰소리로 항의하던 분도 나중엔 감정이 진정되었는지, 옆의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하더군요. 좋게 좋게 말씀하시던 그 선배님은 그 회의 후로는 뵙지는 않았지만 지역민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던 분이더군요. 참 존경할 만한 인생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큰 목소리는 절대 금물입니다. 우선은 상대방의 입장도 배려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되, 일단은 음성을 철저하게 낮춰야 하고 말도 천천히 해야 합니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 처해도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지녀야 상대방을 기분나쁘지 않게 하면서 설득이 가능한 법입니다. 오늘 오후 갑자기 그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당시 저도 30대고 그 선배님도 불과 40대였을 텐데 노후에 접어든 지금의 저보다 훨씬 훌륭하게 발언하신 것 같지요. 저는 지금도 많이 부족한데 말입니다. 


어딜가나 유난히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지막한 음성에 부드러운 어조로 천천히 말씀하는 분도 게십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는 불필요한 우문(愚問)이 아닐까 싶습니다. 


P.S


참 얼마 전에 건축 관련 책을 써서 유명한 저자가 우리 지역에 와서 특강을 하는데, 이분이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면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인사도 하지 않았답니다. 저는 그 날 특강을 직접 보진 않았지만 청중들은 유명한 겅사가 서울에서 온다고 하여 기대를 많이 하고 참석하였는데, 상당히 불쾌하더랍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역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떠나갔다고 하네요. 당일 강의를 들으려고 참석한 사람이 저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기에 그게 사실이냐고 몇 번 확인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시건방진 사람이 무슨 특강을 하는 유명인사라고 웃긴 사림이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했습니다. 


"있잖아요. 사람은 모름지기 잘 나갈 때 고개를 팍 숙이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게 전국을 돌면서 유명해지니까 아주 건방지고 그런 모양인데, 그렇게 하다가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습니다. 가만히 두세요. 그 사람 조만간 큰 망신을 당하거나 악평을 받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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