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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Oct 03. 2023

옥리(獄吏)가 이렇게 대단한 줄 내  어찌 알았으랴

대장군 주발이 한갓 옥리의 도움을 받아 석방되었다.

불후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총 130권으로,  황제가 주인공인 12본기(本紀), 제후 중심의 30세가(世家), 그리고 온갖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 70열전(列傳), 10표(表), 8서(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열전 부분이 특히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나와서 국내에서 사기열전으로 번역을 많이 했지요. 이번에는 백만 대군을 호령하던 장군의 일대기를 보며 사람 사는 세상의 원리가 수천 년 전과 지금이 유사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한나라 개국공신 주발(周勃) 이야기입니다. 진(秦)시황 사후 중국 천하가 혼란에 빠졌을 때, 항우와 유방이 5년간 초한쟁패를 하지요. 결국 최후 승자는 유방이 되는데, 그 유방을 도운 인물이니 참으로 대단한 개국 공신이라고 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한고조 유방이 죽고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가 유씨가 아닌 여씨 정권을 획책하여 여씨들로 전횡하던 상황에서 주발이 여씨들을 숙청하여 다시 유씨 천하로 이끌었습니다. 강(絳) 땅에 봉지를 받았다 하여 강후(絳侯)이며, 「강후세가(絳侯世家)」는 주발과 그 아들 주아부가 주인공이지요. 주발의 사람됨됨이를 알려고 하면 사마천의 아래 언급을 참고하시면 좋겠네요.



勃為人木彊敦厚,高帝以為可屬大事。
주발은 사람됨이 소박하고 강직하며 돈후하여 고제는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勃不好文學,每召諸生說士,東鄉坐而責之:趣為我語.

주발은 문장과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매번 유생과 유세객들을 접견할 때는 동쪽을 향해 앉아서 그들에게 요구하였다.

“내게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시오!”

其椎少文如此。
그의 순박하고 글재주가 없기가 이와 같았다.



주발은 어려서부터 한 고조 유방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창업한 공신이었습니다.  주발은 한나라 창업 후에도 수많은 제후들의 반란을 유방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토벌해 한나라의 안정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모든 전란이 마무리 되었을 때 한 고조 옆에는 주발과 진평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훗날 한고조 유방이 죽자 뒤를 이어 유영이 황제가 됩니다. 바로 ‘혜제’였지요. 문제는 혜제가 너무 나약했다는 것이었지요. 실제 권력은 유방 부인이자 혜제의 생모인 여 태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고, 여태후는 여씨 일족 정권을 획책합니다. 여씨들이 권력의 주류가 되었으니 유씨 집안이나 유방을 도운 개국공신들이 설 자리가 없었지요. 개국공신들조차 여태후와 여씨 일족들의 감시 하에서 불안에 떨고 살았습니다.


그들 중 주발과 진평은 각기 우승상, 승상으로 관리들의 수장이었지만 실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정사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강후세가(絳侯世家)」문장을 살펴 볼까요.



呂祿以趙王為漢上將軍,呂產以呂王為漢相國,秉漢權,欲危劉氏.

여록(呂祿)은조왕(趙王)의 신분으로 漢의 상장군(上將軍)이었고, 여산(呂産)은 여왕(呂王)의 신분으로 漢의 상국(相國)이니, 그들이 漢의 권력을 장악해서 유씨를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勃為太尉,不得入軍門.

주발은 태위인데도 軍門에 들어갈 수 없었다.

陳平為丞相,不得任事.

陳平은 승상인데도 정사를 처리할 수 없었다.



천하는 이렇게 여 씨의 것이 되었습니다. 여 씨들은 마음 놓고 제후 왕 자리를 차지했고, 혜제에 이어 소제가 황위를 이었지만 여 태후의 독재 정치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던 주발은 진평, 관영 등과 함께 일거에 여 씨 일족을 숙청하고 유방의 넷째 아들 유항을 제위에 올렸습다. 이 사람이  바로 ‘문제’입니다. 황통을 다시 유 씨로 이은 것입니다.


한 문제는 “주발이 고조를 따라 한나라를 창업하고, 나를 도와 다시 한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만고의 충신이고 공신이다. 우리 유 씨 황족의 버팀목이다”라고 극찬합니다. 진평이 죽자 주발이 승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권력 세계는 비정합니다. 한 문제가 등극할 때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주발이 이젠 거추장스런 존재가 됩니다.  문제는 주발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문제는 주발을 넌지시 불러 식읍을 1만호로 올려주고 대신 영지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는 두말없이 문제의 명을 받아 승상 직을 사임하고 영지로 돌아갑니다.   


   十餘月,上曰:
前日吾詔列侯就國,或未能行,丞相吾所重,其率先之.

주발이 승상이 된 지 열 달 남짓 뒤에 문제가 말하였다.
“지난번 내가 열후에게 봉지로 돌아가라고 조서를 내렸는데,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이 있소, 승상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 솔선하여 봉지로 돌아가시오.”

乃免相就國。
이에 승상을 사직하고 봉지로 돌아갔다.


그렇게 봉지로 돌아간 주발은 항상 불안했습니다. 일 년 남짓 지나 하동군(河東郡)의 군수와 군위가 현을 순시 중에  강현(絳縣)에 이를 때마다 죽임을 당할까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집안의 병사와 하인들을 모두 무장시켰고, 영지의 관리들이 자신을 찾아 올 때면 무장을 하고 갑옷을 입은 채 그들을 맞았습니다. 이런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주발이 모반을 꾸민다는 보고를 받은 문제는 주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발은 억울했지만 자신은 결백하고 또 그동안의 공이 있으니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문은 가혹했고 일개 옥리마저 주발을 구박하고 업신여기기까지 하지요.  누군가 주발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일단 옥리에게 뇌물을 주고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주발은 옥리에게 황금을 전했습니다. 옥리는 주발에 이런 저런 편의를 주었고.


吏稍侵辱之.

옥리가 갈수록 주발을 모욕하였다.
勃以千金與獄吏,獄吏乃書牘背示之,曰 以公主為證.

주발은 천금을 옥리에게 주었더니 옥리가 목간의 뒷면에다 글을 써서 주발에게 보여주었다.
“공주를 증인으로 세우시오.”
公主者,孝文帝女也,勃太子勝之尚之,故獄吏教引為證。
공주가 바로문제의 딸로 주발의 맏아들 승지(勝之)가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옥리가 공주를 끌어다 증인으로 세우라고 가르친 것이다.


주발은 이 급박한 상황에 정신이 혼미해져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발이 며느리인 공주를 통해 문제의 모후인 박 태후에게 손을 썼습니다. 박 태후의 동생인 박소에게 황금 5000근을 바치고 박 태후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했습니다.


文帝朝,太后以冒絮提文帝,曰:
「絳侯綰皇帝璽,將兵於北軍,不以此時反,今居一小縣,顧欲反邪!」


문제가 알현하자 태후는 두건을 문제에게 던지며 말하였다.
“강후는 황제의 옥새를 매고 북군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을 때도 반역하지 않았는데, 지금 작은 현 하나를 가졌는데 오히려 반란을 꾀했겠습니까!”



여기 대화 중에 나오는 모서(冒絮)는 두건을 말합니다. 태후가 말을 이어갑니다. 주발은 한나라 창업과 황제의 즉위를 도운 절대 공신이고, 역심을 품을 위인이 절대 아니니 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문제는 주발을 방면했습니다. 강후 주발이 감옥에서 나온 후 이렇게 한탄합니다.


吾嘗將百萬軍,然安知獄吏之貴乎!

“내가 일찍이 백만 대군을 거느렸지만 옥리가 이렇게 대단한 줄 어찌 알았으랴!”


제국 한나라 개국공신이자 한고조 유방의 일등 참모였던 장군 주발이 한갓 옥리(獄吏)의 위력을 절감한 이야기입니다. 뇌물을 주어 위기를 벗어난 것이나, 며느리인 공주를 이용한 것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하겠지만, 여기서는 그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하는 교훈이 아닐까요. 그래서 사기의 이사열전(李斯列傳) 중 간축객서(諫逐客書)에서 이런 말이 나오지요.


 "太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으로 풀이하면 "태산은 한 줌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아 거대함을 이루었고 하해는 가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아 깊음을 이루었다"




P.S 그렇게 풀려난 주발이 몇 해 뒤에 죽었습니다. 그의 봉작과 영지는 큰 아들인 주승지가 이어 받았습니다. 주승지는 경박한 인물이었습니다. 황제의 사위, 한나라 건국 공신의 아들이라는 든든한 배경만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살인 사건에 연루됩니다. 문제는 주승지의 봉작을 파하고 귀양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발 가문의 봉작을 누가 이어받으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주발의 둘째 아들 주아부가 명석하고 처신이 바릅니다.”


하내군의 군수 직을 맡고 있던 주아부는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봉작을 이어받아 조후가 되었습니다. 주아부는 형 주승지와 달리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학문의 성취도가 높았습니다. 다만 강직한 성품으로 원리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꺼려해 융통성이 부족했지요. 그로 인해 친구도 많았지만 적도 많았습니다. 훗날 주아부도 굵어주는 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데 그건 훗날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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