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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29. 2023

그리움 속으로

저 들길 끝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 기다리고 있으려나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추석날 밤 들길을 걸어가는 꿈을 꿉니다. 혼자서 걸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몸은 비록 도시에 있지만 마음은 시골 고향 마을 들길에 서 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 함께 생활했던 수많은 얼굴들을 그립니다. 저렇게 길게 난 들길은 그 옛날 우리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걸었던 길입니다. 소달구지를 타고 가던 날도, 경운기 뒤에 타고 달리던 날도, 새참을 이고 오시던 어머니를 저 멀리까지 마중 나가서 받아 들고 오던 때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57) 영아 - 김만수 / (1977) (가사) - YouTube


드넓은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빛 벼들 사이로 뛰어가면 두 손으로 메뚜기는 또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모릅니다. 들풀 줄기 하나에 메뚜기를 촘촘하게 걸어 집에 가서 참기름에 볶아 맛있게도 먹었지요. 닭고기 냄새가 나던 개구리 뒷다리 살은 왜 그렇게 통통했을까요. 시냇물엔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족대를 놓고 두 발로 마구 휘저으면 많이도 잡혀 올라오던 미꾸라지도 생각납니다. 청량한 가을 바람 속에 들길 끝 무렵에 있는 작은 다리 위에서 멀리 이웃 마을 여학생들을 생각하며 불렀던 노래들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저리 길게 난 길을 함께 걸으면서 낄낄거리기도 했지요. 


추석이나 설 명절엔 우리 마을 한가운데 넓은 공터에서 인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노래자랑대회가 해마다 열렸고, 태수 형님의 걸쭉한 사회로 분위기가 정말 좋았지요. 당시 우리들에게 아이돌 같았던 신숙 누나의 트로트 노래도 일품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이 홈그라운드 잇점을 안고 당연히 우승할 줄 알았는데, 심사위원이 공정한 덕분에 다른 마을 사람이 1등상을 받았지요. 그래도 우리 마을 아지매, 아재들이 큰 박수로 축하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지요. 참 상품은 호미, 낫, 삽, 괭이, 다라이, 플라스틱 용기 등이었습니다. 누가 우승하느냐보다 노래자랑 그 자체를 즐겼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57) (조영남) 옛 생각/Alto Sax/홍응목 - YouTube



저도 아이들과 함께 메인 무대 바로 앞에서 신숙이 누나 응원하면서 큰 박수를 치기도 하고 소리도 질렀습니다. 우리가 아는 노래가 나오면 합창도 심심찮게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저만치 어머니가 아지매들 사이에 앉아 미소띤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게시기에 달려가서 어머니 곁에 앉았습니다. 어머니께선 제 손을 잡으면서 어깨까지 꼭 끌어안아 주십니다. 그러면 옆에 계시던 상동띠기 아지매도 제 팔을 잡아주었습니다. 아지매가 한 마디 하셨지요. 


"아지매는 야~가 그리 좋나. 맨날 볼 때마다 야~를 꼭 끌어안고 그라대. 야~야 니도 엄마가 그렇게나 좋은가베."


그러면 어머니께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시다가 두 손으로 감싸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때 어머니 손 바닥 느낌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많았던 아지매, 아재들 모두 모두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좀 많았을까요. 추석 날 밤에는 보름달도 떠서 우리 마을 사람들 맘이 모두 붕붕 뜬 것 같았습니다. 다들 저녁에 맛난 찌짐이나 송편을 먹고 동네 골목을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이렇게 노래자랑대회 장소로 모였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립습니다. 그렇게 다시 모여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참! 노래자랑대회가 열리는 날 밤에 막걸리를 유난히 즐기며 마시던 동네 형님들 모습도 떠오릅니다. 넓은 공터 경게 쯤에 약간 높은 대(臺)가 있었는데, 그곳 평상에 형님들이 무리를 지어 막걸리를 정말 즐겁게 마시더군요. 어쩌다 아재들이 지나가면 다들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다시 앉아 마시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재들이 그곳을 돌아 지나갑니다. 형님들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제가 그렇게 볼 수 있었으니 저도 새상 물정을 좀 알았던 것 같습니다. ㅎㅎ. 


두어 살 위 형 누나들 생각도 많이 납니다. 대부분 국민학교 졸업 후 대부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대구 또는 서울까지 공장에 가서 힘들게 일하면서 명절 때 새옷 입고 내려오던 그 형 누나들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지요. 명절에 어쩌다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머니에서 돈을 많이 꺼내 자랑했었지요. 어린 마음에 저렇게 많은 돈 저도 갖고 싶었던 게지요. 그 형 누나들이 대도시에 나가서 얼마나 골병들었는지는 모르고 그냥 월급 받아 들고 있는 것만 보고 돈이 많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그들따라 도시에 가서 공장에서 돈을 벌어볼까 생각하고 어머니께 슬쩍 말을 꺼냈다가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절대로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반드시 보내 줄 테니 공부만 생각하란 어머니의 엄명이 계셨지요. 


그 형 누나들은 그 후로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세월이 흘렀네요. 저처럼 옛추억에 젖어 시골 들길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봅니다. 이제 인생 내리막길에 서 있는 저로선 그들을 언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추석 보름달 참 밝습니다. 도시에서도 달이 저렇게 밝은데 고향 마을의 하늘에도 곱고 환하게 떠서 우리 마을을 밝히고 있겠지요. 저렇게 길게 난 들길을 따라 보름달 아래 걸으면서 그리움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싶은 밤입니다. 혹시나 저 들길 끝에 낯익은 얼굴 하나 가다리고 있으려나 하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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