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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29. 2023

개묘(蓋苗)의 절절한 간언

지금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서 도저히 상환할 수 없습니다.

       

 자오촨둥(趙傳棟)이 쓰고 노민수가 번역한『쟁경』 751쪽에 보면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절박하게 간언한 원나라 관리 개묘의 사례가 나온다. 저자가 『원사(元史)』 「개묘전」 부분을 소개하고 있는데 개묘의 간언이 정부 관리로서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관리가 황제에게 정면으로 대응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백성들의 삶을 먼저 챙기는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을 테지만 관리 개묘는 백성들의 삶에 모든 것을 걸고 그렇게 간언을 올렸고, 실질적으로 백성들에게도 이로움을 주었다.    

       

원나라는 중국 정통 한족이 아닌 이민족 왕조로서 역사상 최초로 중원을 통일한 몽골족의 나라다. 북방 민족의 피가 섞인 한족이 세운 통일 왕조로는 수나라나 당나라가 있었지만, 순수 이민족 혈통의 왕조가 세운 통일 왕조는 원나라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몽골의 신분 체제는 '몽골인 → 색목인 → 한인 → 강남인' 이렇게 계급 순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때 한족들은 3등급, 4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하였다. 상고시대부터 중국 대륙에 살고 있던 한족(漢族), 즉 중국인들은 자기 자신들이 세계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며, 최고의 문화 민족이라는 ‘중화 사상’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원나라 치하에서 한족은 피지배층으로 전락하여 엄청난 설움과 고통을 겪게 된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자신들 이외의 민족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하여 모조리 오랑캐로 폄하할 정도로 자기중심적 사고가 강했다. 이러한 중국인들에게 몽골인들은 그야말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농경사회의 정착 민족의 특성을 지닌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유목 민족의 생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몽골인들을 거칠고 야만적인 족속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고가 팽배하던 중국을 무력으로 지배하게 된 몽골인들은 한족을 통치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한족을 우대한다고 해서 그들이 자존심을 굽히고 몽골인 말발굽 아래 고분고분할 리 없으니, 중원을 지배하고 통치하는데 심사숙고했음이 틀림없다.


오랜 기간 유교가 지배하면서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중국 조정에서 무력을 바탕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려던 몽골은 문치보다 무력을 선호하였기에 의기가 넘치고 절개 가득한 신하들이 간언을 올리는 모습이 드물었다. 그래서 원나라 대신 개묘의 간언은 더욱 살펴볼 만하다. 그가 제령노(濟寧路) 단주(單州) 판관을 맡을 때에 심각한 기근이 일어났다. 개묘가 관아에 기근 상황에 대해 보고하면서 대책을 요청하였지만 관심을 보이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지방도 기근이 발생하여 지방 군청에선 그저 시간이 흘러 진정되기만 기다릴 심사였지만, 개묘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여 진정을 넣으니, 군청에서 개묘를 아예 조정의 호부로 보냈다. 개묘를 통해 조정에서 단주 지역 백성들을 구해주기를 요청하게 하려는 의도였지만 개묘는 오히려 호부의 심한 질책만 받았다. 이에 개묘는 중서당으로 가서 자신이 가져온 강병(糠餠) 즉, 쌀겨 떡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단주 지방 백성들이 기근과 흉년에 시달려 쌀겨 떡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며, 그나마 이것마저 먹을 수 없는 백성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도 구제하지 않겠냐고 참으로 절박하게 하소연했다.      

      

관리의 체면도 모두 던져 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너무나도 절박하게 요청하니 당시 재상도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깨닫고 그 자리에서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도와주었다. 지방 관리가 자신이 관할하던 지역 내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중앙 정부에 올라가 백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눈물 흘리며 애원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1000여 년 전의 아득한 중국 대륙의 원나라 관리 개묘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공직자의 마음가짐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역사에 그런 관리가 있었던가. 행여 있었다 한들 체면을 그렇게 강조하는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 왕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개묘가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군의 관아에 오래 묵은 좁쌀 오백 섬이 있어 기근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우선 빌려 주고 추수가 끝난 뒤에 상환하도록 약속했다. 그런데 당시 흉년이 드는 바람에 백성들이 그 빌려 먹은 곡식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백성들이 처음부터 나라의 곡식을 그냥 공짜로 먹을 생각을 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당연히 수확하여 갚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천재지변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백성들도 흉년 때문에 도무지 상환할 방법이 없었다. 상부에서 사자를 보내 빚을 갚으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게다가 지주(知州) 관헌들도 백성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이에 개묘가 백성들을 위하여 나섰다.   

         

“관아의 좁쌀은 저 개묘가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서 도저히 상환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제가 대신 갚도록 하여 주십시오”          


苗曰:“官粟實苗所貰, 今民饑不能償, 苗請代還.           

    

개묘의 이 말에 상환을 닦달하러 온 사자도 더 이상을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렇듯 백성들의 어려운 상황을 파악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정성껏 상급 기관의 서슬퍼런 관리에게 청원하는 개묘의 자세는 실로 존경할 만하지 않은가. 필자도 새벽녘에 이 부분을 읽다가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생각에 빠졌을 정도였다. 하위 관리가 상부 관청의 관리, 그것도 질책하러 온 사자에게 청원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또 웬만한 관리가 이렇게 할 생각이나 있겠는가. 그저 자신의 보신에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상부의 명을 어긴다거나 항명하면 어떤 꼴이 날지 뻔한데 말이다. 그런데 개묘는 전혀 달랐다. 백성들이 빌려 먹은 곡식을 자신이 책임지고 상환하겠다는 진정한 목민관의 모습을 보였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그들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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