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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Oct 08. 2023

흘러가는 강물처럼

나이가 들면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오는 시절에는 그냥 스쳐지나갔을 주위 풍경이지만, 이제 본격적인 노년세대의 삶에 들어서니 아주 사소한 대상들도 눈에 자세히 들어옵니다. 세상 그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한 것이 없고, 세상 사람 그 누구도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음을 깊이 실감합니다.


제가 즐겨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갑자기 그 구절이 떠오릅니다.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글인데, 명문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문장들마다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내용이 많은데, 한 구절 언급해 볼까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 사람들 귀하지 않은 사람 하나도 없다는 내용과 결이 유사합니다. "간축객서"는 진시황을 보좌하여 천하를 경영한 승상 이사(李斯)가 진시황에게 올린 글입니다. 이사의 문장은 화려하면서도 경박하지 않고, 다채롭게 글을 꾸몄음에도 논리정연함은 물론, 문장의 짜임과 구성이 간결하고 조화로워 글의 목적인 설득에도 충실함과 동시에 아름다움까지 지녀 옛 중국 최고의 명문으로 꼽힙니다.


좀더 배경을 설명해 볼까요.


진시황이 천하 통일 사업에 착수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한(韓),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齊)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전국 7웅의 할거에 종지부를 찍고, B.C  221년에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진시황이 통치하고 있을 때입니다. 한(韓)나라 사람으로 정국(鄭國)라는 토목기술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진(秦)나라 위해 낙수洛水를 끌어들여 전답에 물을 대는 정국거鄭國渠를 건조했는데, 얼마 뒤에 정국의 음모 활동은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거대한 토목공사로 진나라 재정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드러났지요. 그래서 진나라의 왕족과 대신들은 진왕에게 건의합니다.

 

“제후국 사람이면서 진秦나라에 와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서 진나라에 유세하여 이간질을 하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와 있는 사람을 모두 쫓아내십시오.”

 

왕족과 대신들의 토론을 거친 뒤, 이사(李斯)의 이름도 축출자 명단에 들어있었습니다. 이사가 초(楚)나라 상채군의 말단 관리 출신이었거든요. 이사가 출세하고 진시황의 총애를 받는 일인지하, 만인시상의 승상 자리에 올랐으니 그에 반하는 세력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이런 일이 발생하였고, 이에 진시황이 내린 것이 바로 축객령입니다. 손님을 쫓아내라는 명령이지요. 여기에서 손님이란 진나라 출신이 아닌 타국 출신의 관리였습니다. 이사가 당연히 주요 타킷이었겠지요. 그러자 이사가 그에 반박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니 그것이 바로 "간축객서"입니다. 외부 출신 관리를 쫓아내는 명령에 간언하는 글이지요. 전체가 명문장입니다. 그중 한 구절입니다.


" 태산불양토양(太山不讓土壤)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태산은 한 줌의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고, 하해는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 사기열전 번역본을 보다가 문득 제 삶을 다시 돌아봅니다. 지금 현재까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떠올립니다. 모든 인연이 온전히 생각나진 않지만, 그래도 많은 만남이 떠오릅니다.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짓기도 하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은 일부러 외면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보니 그런 모든 만남이 제 인생에 다양한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그렇지 못한 것은 그것대로 말입니다. 앞으로는 좋은 인연만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 욕심이겠지요. ㅎㅎ.


이젠 그냥 흘러가는 강물처럼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제 주위에 있는 그 누구든 소중하게 여기면서 함께 살아가고 싶습니다. 무슨 특별한 인생 목표를 세울 일도 없고, 뭔가 이루지 못해 스스로를 질책할 일은 더 더욱 없겠지요. 그냥 사람들과의 관계를 너그럽고 여유롭게 만들어 가려 합니다. 인색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따뜻한 미소를 그들을 대하면서 좋은 사람으로만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


퇴직 직후에 제 나이 또래 사람들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습니다. 인간은 누구가 죽는다는 천하의 진리가 분명 있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병원에서 기약 없이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병을 가거나 조문을 할 때, 갑자기 제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어떨 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직은 이 세상을 떠날 나이가 아니지 않느냐고 스스로 묻고 답하기도 합니다만, 인명재천이라고 인간의 수명이 어디 정해져 있던가요. 신(神)이 오라면 미련없이 떠나야 할 뿐이지요. 그 순간까지 우리네 삶의 행복을 누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두루 두루 베푸는 그런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살아가고 싶습니다.


며칠 전 인근 요양원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요양원 풍경을 태어나고 처음 목격하였지요. 방마다 네 분씩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그렇게 계신다는 관계자의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노인 한 분과는 대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귀찮고 그냥 누가 자신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인생이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소연을 하셨지요. 제 손을 꼭 잡고 그런 넋두리를 하시는데, 제가 지금껏 살아오고 경험한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습니다. 그냥 강물처럼 세상 욕심 없이 살아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세상살이 중에 무슨 욕심으로 그렇게 아귀다툼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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