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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추억

생전 처음으로 5일장에서 아버지와 막걸리 대작하고, 어머닌 정구지 찌짐을

by 길엽

지인과 오랜만에 만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1월 초인데도 날씨가 조금 더운 것처럼 느껴지지만 바다 밤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와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술잔을 나누면서 근황을 서로 들려 줍니다. 저한테 특별한 재주랄 건 없지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재주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기, 경청"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저와 함께 자리하는 누구든 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려줍니다. 어느 여자 선배님은 당신의 부부간 싸움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이고, 내가 말하다가 그만 이런 쓸데없는 거까지 말해버렸네. 주책없이."


사람들을 만나 보면 모두 다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유난히 하고 싶어합니다. 자랑도 하고, 하소연도 털어놓고 등등, 온통 그들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듯합니다. 치부라고 숨길 만한 이야기도 자신도 모르게 들려줍니다. 제가 그런 말을 들었다고 어디 가서 동네 방네 알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전문상담사를 하시는 어느 분께선 저에게 '상담사'를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보니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報施) 같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요즘 삶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지인께서 갑자기 저에게 어린 시절 가장 많이 생각나는 추억이 뭐냐고 묻습니다. 고향 시골 마을 농가에서 자라고 십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닌 저에게 추억거리는 무궁무진하지만 막상 하나를 콕 집어 말하라고 하니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이 비록 가난했지만 그래도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 그리고 여동생까지 다섯이서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던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폭포수 같이 한없이 풍부한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지금껏 평탄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 크고 작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정말 큽니다. 지인께서 굳이 가장 기억이 나는 추억을 물어보니 저도 숱한 추억 중에 하나를 선택하였습니다.


스무 살 대학에 합격한 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 셋이서 시골 5일장에 갔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대학 합격한 것이 그리도 좋으셨는지, 어머니께선 어딜 가시든 저를 꼭 앞세우셨지요. 뭐 그리 대단한 자랑거리가 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때는 저도 그리 싫지 않았습니다. 당시 경북 달성 논공면 금포1리 면소재지 5일 장터 일명 '돌끼장'에 갔던 날입니다. 벌써 40년이 훌쩍 넘은 아득한 세월 넘어 추억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선 마을 이장을 오래 하셔서 5일장이 있는 날엔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면사무소와 농협에 들러 이런 저런 볼일을 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여러 민원도 함께 처리하시느라 오전 내내 바쁘셨습니다. 그리고 점심 즈음엔 우리와 합류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5일장에 가자마자 찌짐과 막걸리를 파시는 가게 주인과 자리를 바꿉니다. 낮으막한 탁자에 앉으시더니 직접 정구지 찌짐을 부치기 시작합니다. 가게 주인 아주머니와는 워낙 친하셔서 서로 허물이 없었고, 어머니가 찌짐을 부치시면 그 아주머니께선 잠깐 다른 곳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가지고 오셨지요.


어머니께서 그 아주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터띠기요. 지금부터 내가 정구치 찌짐을 꾸버서 내놓을 테니 어딜 다녀오세이. 먹고 나서 계산을 다해줄 테니 걱정말고. 지금부터는 내가 잠깐 꾸불 끼니까 그리 알고 갔다오이세이."


평소 그 아주머니가 부치는 찌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구지 전이 두툼합니다. '그렇게 두껍게 전을 구으면 남는 기 없다'고 가볍게 타박하는 아주머니의 미소 띤 얼굴을 어머니께서 그냥 외면해 버립니다. 마침에 가게에 오신 아버지와 제가 마주 앉아 5일장에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막걸리를 함께 마셨지요. 어머니께선 정구지 전을 연달아 부쳐 내놓습니다. 아버지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시는 막걸리 잔을 받으면서 저는 잇달아 고개를 돌려 마셨지요. 어머니께서 저를 보시면서


"야~야 니 술이 이렇게 쎘나? 니 술 마시는 거 처음 봤는데 이렇게 많이 마셨더나. 나도 한 자 도고. 그라고 오늘 말고 이 다음부터는 너무 마이는 마시지 마래이. 그래도 니가 대학 합격하고 난 진짜 좋더라. 니 자랑 마이 하고 다녔다 아이가. 참말로 고맙데이."


그리곤 어머니도 제가 드리는 술잔을 드시는데 잔이 커서 웬만한 그릇 정도였지요. 같은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와 제가 대작하고 있는 모습을 아주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어떤 이는 함께 자리하여 막걸리 몇 잔을 마셨습니다. 어머니는 뭐가 그리 좋으신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어머니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될 듯합니다. 5일장 돌끼장 터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랑 함께 있었던 추억의 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최근에는 그 시장이 없어졌다고 해서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국민학교 시절 5일 장터에 가기만 하면 부모님이 계셨고, 그렇지 않으면 외삼촌, 이모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저와 만났습니다. 제가 배고픈 것을 알아채고 많이 사주셨습니다. 같이 하교하던 친구들도 은근히 그것을 기대하곤 했지요. 돌아보면 참으로 좋았던 시절입니다.


당시 큰 잔에 담긴 막걸리를 한 잔 들이키고 저를 빤히 쳐다보시며 말씀하시던 어머니 생전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야~야, 마이 묵으래이. 내가 제대로 챙기주지도 몬 한 기 진짜 미안키만 한데. 니는 내한테 진짜 잘 해주이 정말 좋다. 니는 이날까지 크면서 엄마 마음 안 상하게 할라꼬 진짜 애 마이 썼다. 다른 집 아~들 같이 험한 말 한번도 안 했다 아이가. 느그 아부지 노름한다꼬 사함들이 뭐라 캐도 니는 내가 무시당할까 봐 내한테 지극정성이었데이. 그래서 사림들이 니가 무서버가 내한테 함부로 몬 했데이. 그라고 뭐니뭐니 캐도 우리 마을 전체에서 니만 대학에 떡 합격했으이 내가 얼마나 고마븐지 모린다. 참말로 고맙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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