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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

by 길엽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잠깐 읽다가 문득 오래 전 일이 생각났습니다. 나이가 들면 지난 날 회상을 많이 하게 되고 생각지도 않았던 추억들이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모양입니다.


고3 진학지도를 오랜 기간 하면서 아이들 원서를 작성할 때 부모님 특히 어머님들이 아들과 함께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등학교부터 12년 간 아이들 키운다고 고생 많이 하신 어머니 입장에선 내 아들 조금이라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지요. 어디 초등학교뿐이었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얼마나 소중하게 키웠습니까. 내 자식은 잘 키워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지요. 긴 세월 정말 노심초사하면서 보냈을 테지요.


하지만 대학 입시 원서는 결국 숫자놀음이라 아주 냉정하지요. 철저하게 점수에 맞춰 원서를 작성하기 때문에 그 안에 무슨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평소에 아들로부터 들었던 점수와 실제 눈앞에 나온 성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망도 많이 합니다. 한번은 이런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어머니가 일하신다고 학교에 오시지 못했는데, 저와 대입 원서 작성 상담을 끝내고 자신의 점수에 적절한 대학도 결정했지요. 지금부터 20녀 전이니 현재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아이가 어머니께 연락을 드리고 싶다고 해서 학교 전화로 연결했습니다. 어머니도 전화를 기다린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담임이라고 소개하고 아이 키운다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란 말과 함께 전화를 하게 된 이유도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아이에게 전화를 바꿨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제 성적이 부족해서 어머니가 바라는 대학에 가지 못 할 것 같아요. 어머니 고생하시는데 너무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공부를 열심해 할 걸 하는 후회가 많이 생깁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아이의 목소리가 울먹 울먹하더니 나중엔 진짜 울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말씀은 직접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까지 아니 지금까지 그렇게 어머니께 공손하고 예의바른 학생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곁에 있는 제가 정말 많은 것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아이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지만 학교 생활엔 예절도 바르고 친구들이나 선생님들께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미소가 일품이었습니다. 교실 청소 같은 다른 아이들이 회피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솔선수범하여 모범상도 받았던 학생입니다.


그때만 해도 고교생 아이가 어머니께 존댓말을 쓰는 것도 드물었고, 자신의 성적을 솔직하게 밝혀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매우 놀라웠지요. 그 어머니도 특별한 말씀 없이 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전화를 끊었던 것 같습니다.


모자간의 정은 정이고 입시는 냉정한 현실이었지요.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착한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고 훌륭한 인재가 되어야 우리 사회가 좋아질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히려 제안했습니다. 원서 한 장은 지금 현재 성적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너의 희망 대학 학과를 써라. 나머진 성적에 맞춰 해보자.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원서를 그렇게 터무니없는 곳에 작성하게 한 것도 저로는 거의 처음이었지요. 담임 선생 모르게 지원서를 바꾼 학생을 제외하면 말이지요.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포기하고 쓴 대학 공과대학 기계공학과가 미달이 된 것입니다. 당연히 헙격했지요. 다른 대학도 함께 말입니다. 나중에 그 어머니께서 졸업식에 오셔서 아들과 저와 셋이 잠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떼 보니까 그 아들이 어머니께 그렇게도 공손하게 한 이유가 이해가 되더군요. 어머니 표정이 참으로 인자하고 온화했습니다. 말씀도 잔잔하시고. 이날까지 아들 교육에 공부를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그냥 좋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더군요. 힘들게 일해도 초등학교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이 당신의 근무지에 잠깐 들렀을 때 보면 그렇게나 행복했다고 말입니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유난히 어머니께 이쁘게 했다고 합니다. 아이의 모든 것이 어머니 당신에게 큰 복으로 여겨졌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졸업식에 오신 그날도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참 부드러웠습니다. 그런 어머니 슬하에 좋은 아들이 태어나 자랄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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