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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날에는 집을 나서서 걷고

by 길엽

새벽 일찍 눈을 떴다. 방문을 열어 길게 난 들길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 밤 늦게까지 읽고 있던 책 <진시황강의>가 이불에 그대로 놓여 있다. 10여 전 서울 출장 다녀오는 길에 서울역 지하 서점에서 샀던 책인데 그후로 이 책을 늘 읽었지. 분서갱유라 하여 책을 불사르고 유자들을 묻어 버렸다는 폭군 이미지가 강한 진시황의 진면목을 추적한 두툼한 책인데 상당히 흥미롭다.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었기에 이젠 이 책을 읽는 것이 취미가 되었지. 이 책을 읽고 나서 관련 자료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역사 전공자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워낙 관심이 많았기에 가능했겠지.


이렇게 시골에 들어와 살면서 가장 큰 변화라면 저녁 잠드는 시간이 일정치 않은 점이다. 퇴직 전에는 그래도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 패턴이었다면 여기서는 잠드는 시간이 들쑥날쑥할 정도다. 어제 밤 같은 경우는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다가 얼굴에 책을 덮은 채 잠시 이불 속에 누웠는데 눈을 뜨니 벌써 새벽이다. 그렇다고 일찍 일어나 어딜 갈 것도 아니니 재촉할 일도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수면 시간은 규칙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도 불규칙적으로 잠자리에 들면 다음 날 생활에 지장을 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새벽까지 잠자지 않고 책을 읽은 날은 낮에 어딜 가도 정신이 멍하게 된다. 아무리 공기가 깨끗한 시골 마을 들길이라도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자면 피곤한 기운이 하루 종일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도 어제는 오랜만에 이 책을 손에 들다 보니 조금만 더 읽고 조금만 하다가 밤이 깊어 나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다. 그래도 좋다.


왕리췬 저, 홍순도 홍광훈 역 -중국 최초 통일제국을 건설한 절대 군주 진시황과 그의 제국 이야기


그런데 신기하게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 취침 시간이 4시간 정도 되지 않아도 기분이 개운하다. 어제 읽다 만 책을 다시 손에 들고 읽으려 하는데 열린 방문 저 너머 산 기슭에 안개인지 수증기인지 올라가는 장면이 보인다. 저 속으로 걸어가 볼까 하면서 책을 다시 놓고 방을 나선다. 아직 아침 식사 시간 전이라 할머니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아마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잠시 졸고 있든지, 아니면 이웃집에 갔을 것이다. 여기 시골 마을의 아침 시간은 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르다. 대신 초저녁엔 모두들 일찍 꿈나라로 간다. 농사 일이라는 것이 도무지 불규칙적이고 하루 평균 13~4시간 중노동이라. 저녁밥을 먹고 TV뉴스를 보면서 꾸벅 꾸벅 졸게 된다. 예전과 달리 이곳에도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와 농촌 풍격이 바뀌긴 했지만 노년 세대들의 일찍 잠자는 생활 패턴은 큰 변화가 없다. 여긴 시간이 정체되어 있는 듯하다.


오늘은 짧은 들길을 선택하여 곧장 산기슭으로 들어선다. 깊은 산골이 아닌 구릉 정도의 나지막한 비탈길을 오르내린다. 역시 아무도 없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울 만한데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멀리서 볼 때는 안개인지 수증기인지 그래도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막상 여기에 오니 별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햇볕이 쌩쌩하게 떠오르는 아침과 달리 컨디션이 조금 떨어지는 듯하기는 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이 아득하게 보인다. 저 멀리 강물도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 겨울을 보내면 내년 다시 봄이 찾아와 너른 들판에도 새 생명이 가득 가득 피어나겠지. 난 다시 일 년을 더 보내게 되어 늙어가고, 자연은 다시 푸르러지고. 그래서 인간은 유한하고 자연은 무한하다던가.


산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구릉을 빗겨 나오면서 논들 사이로 난 들길로 돌아선다. 역시 흙길이 부드럽다. 맨발걷기도 괜찮지만 날씨가 약간 흐려 그냥 운동화 신은 채 걷기로 했다. 젊은이가 많이 사는 마을 쪽엔 겨우내 비닐하우스 특스작물 재배로 바쁘겠지만 구릉 근처 이곳은 겨우내 들판을 묵힌다. 노령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들에서 일할 사람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냥 일 년에 일모작으로 농사 짓기도 여의치 않다. 노년 세대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데 농사까지는 절대 무리다. 70대도 젊은 축에 들어갈 판이고, 80대 노인이 경운기를 운전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보인다. 아무리 정신차려 운행한다고 해도 경운기를 80대 노인이 운전하면 사고 위험 가능성이 상당히 커진다. 나도 어린 시절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할 때 경운기를 운전해 보았는데 그게 생각보다 힘이 많이 필요하다. 요즘엔 간결하게 시동을 걸 수 있게 되었다곤 하는데 제대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엔 경운기 시동을 걸려고 왼손으로 경운기 코를 잡고 오른 쪽으로 회전체 축을 잡고 열심히 돌려야 한다. 그렇게 하다가 날라가서 사고를 당한 사람도 있고 손가락이 벨트에 감겨 절단 사고도 간간이 있었으니.


내가 사기열쟌을 늘 읽고 있다는 소문이 이 좁은 동네에도 퍼졌는가 보다. 일전에는 면사무소에서 담당 공무원이 이 마을까지 출장 왔다가 내가 거처하는 집 마루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분도 역시 사기열전에 관심이 많다면서 나와 대화를 하였지.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아는 범위 내에서 나름 열심히 설명했다. 그 분도 박수를 치면서 맞장구를 쳐 주기에 내가 괜히 으스대면서 좋아한 것이 마냥 쑥스럽다. 나보다 한참 어린 공무원인데 어찌하여 사기열전을 접하게 되었는 물었더니 대학 시절부터 그 책을 접했다고 한다. 난 현직 끝 무렵에 와서야 사기열전을 읽었으니 나보다 오히려 그 공무원이 더 전문가가 아닌가. 그가 돌아가고 나서 부끄러워진다.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어느 새 안개 또는 수증기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참 깨끗하다. 날씨가 변화 무쌍하다. 겨울 날씬데도 별로 춥지 않은 것 또 무엇 때문일까. 노년 세대의 하루 하루는 그냥 살다 보니 흘러가는 시간의 축적이다. 무슨 거창한 삶의 목표가 있으랴. 아침에 눈뜨면 삼시 세끼 챙겨 먹고 대충 하루를 보내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들면 일과가 끝나는 식이다. 누가 간섭할 것도 없다. 간섭한다고 말을 들을 사람도 없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그냥 챙기는 것뿐. 다만 나처럼 책읽고 글쓰기 하는 것이 취미인 사람은 시간이 무한대로 놓인 노년 세대의 삶이 보다 충실할 수는 있다. 그것도 부지런해야 하겠지.


노년 세대의 삶에 중요한 것 하나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매일 만 보씩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만 보 걷기만 매일 꾸준히 실행해도 노후 건강은 대략 유지된다. 나이가 들어 골골대면 그것 자체가 자식들에게 엄청난 짐이 된다.. 누가 늙고 싶어 늙었다. 누가 아프고 싶어 아프나 하면서 세상을 탓할 필요도 없다. 자식 세대에 기댈 필요도 없다. 옆에 오지 않는 젊은이들을 원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동년배들끼리 지난 살을 떠올리며 추억 속에 젖어 하루 하루를 보내며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누가 내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나 대신에 아파준다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더욱이 내 삶 내 인생은 오직 내가 스스로 챙겨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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