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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에 고량주라

by 길엽

지난 주 지인들 모임에 참석했다. 몸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빠질까 하다가 지난 달엔 다른 일정 때문에 잠깐 얼굴만 비춘 것이 미안해서 이번엔 무리하여 함께 앉았지. 남자들만의 만남이라 처음부터 술잔이 돌았다. 메인 요리가 들어오기 전 술 안주용으로 간단한 요리를 주문해서 소주를 한 잔씩 나누었다. 그때부터 몸에서 뭔가 불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옆에 있던 선배들이


"왜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몸이 아픈 거 아이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독감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요 며칠 간 원고 수정 작업한다고 좀 무리했더니 온몸이 영 으슬으슬하고 관절 여러 군데가 끊어질 듯 아프다고 답했다. 그러자 선배 한 사람이


"감기엔 고량주 독한 거 한 잔 마시면 금방 효과가 있을 거야. 그리고 요거 양파를 고춧가루에 찍어 먹으며 더욱 빠를 것이"라고 권했다. 그럴 듯했다. 하지만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냥 말빨이 그럴 듯했을 뿐. 한 순간의 선택이 4일간 최악의 몸 상태가 될 줄은 그땐 몰랐지. 선배의 그 말도 안 되는 말에 혹한 내가 바보지. 한 잔도 아니고 서너 잔을 받아 마셨다. 그때부터 순식간에 온몸에 열이 마구 올랐다. 더 이상은 마시면 죽을 것 같았다. 자리에 앉은 지 30분도 안 되어 아무래도 먼저 가야 하겠다고 동의를 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임 장소가 2층이었는데, 1층 게단을 내려가는 것도 힘들었다. 겨우 겨우 계단을 내려와서 문을 나와 밖을 걷는데 이젠 버스 정류장 가는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이대로 버스를 타도 온전치 못랄 것만 같았다. 버스를 타러 걸어가다 얼른 택시를 탔다. 괴롭다. 온몸에 열이 나고 머리는 띵하니 어지럽고, 정말 괴로웠다. 15분에서 20분 걸리는 집은 또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갑자기 온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한다. 열이 펄펄 끓는다. 이마에 손을 대니 내 몸인데도 이렇게 뜨겁다. 아하 술을 잘못 마시면 이렇게도 세상을 하직하는구나 싶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지 평소에 안면이 익은 경비원 할아버지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도 만사가 귀찮았다. 대충 대답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이놈의 엘리베이터는 왜 그리 속도가 느린지, 현관 문에 비번을 눌러야 하는데 한번에 통과되지 않는다. 한번 실패하닌 비번도 갑자기 기억나지 않네. 몇 번 시도하다 어떻게 기억나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때 마침 집에 와 있던 막내아들이 나를 바라보더니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나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힌다. 아이들 방 침대에 누웠다. 세상에 침대가 이렇게도 편할 수가 있다니. 침대에 누우니 한결 편하다. 더 이상 일어나고 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누웠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막내아들이 배도라지 즙을 급하게 데워 와서 마시게 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 수건을 차갑게 적셔서 이마에 둘렀다. 한결 편하다. 그래도 몸의 열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다. 하지만 막내아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간호를 하니 죽진 않겠구나 싶었다. 아내와 딸 아이는 TV를 본다고 정신이 없다. 엄마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했다. 그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있으려니,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럽기만 하다. 처음 침대에 몸을 눕혔을 때는 편했던 마음은 한 순간의 감정이었다. 아내와 딸이 방에 들어와서 다들 깜짝 놀란다. 최근 특별히 아파 본 적이 없는 내가 하얀 수건으로 이마를 두르고 누워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랄 수밖에. 아내가 걱정할까 봐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그 목소리가 점차 기억 너머로 멀어져 간다. 종합 감기약을 가져오고, 그냥 먹으면 곤란하니 뭔가 먹고 약먹어야 한다며 밥을 몇 술 먹인다. 입맛이 있을 리가 없지만 억지로 먹고 다시 약을 먹었다. 약효가 전혀 없다. 그래도 괜찮은 것 같으니 잠시 누워 있겠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니 가족들이 좀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족들을 내보내고 방안의 불을 껐다. 그리고 침대 안에서 컴컴한 공간에 혼자 계속 누워 있었다. 자꾸만 아득히 저 깊은 곳으로 내 몸과 마음이 꺼져 가는 것 같았다. 어지럽기는 왜 그리 어지러운지. 머리에 열은 내렸닥 다시 오르고, 온몸이 떨리고 이불을 푹 덮고 전기 장판을 44도까지 올려 등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데도 열을 못 느끼고, 땀도 안 나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새 아내와 딸 막내아들이 방문을 열고 확인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내의 걱정이 이민저만이 아니다. 모임 가기 전 감기 기운이 왔을 때 병원에 가서 링거주사라도 맞고 오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지금 나이를 생각지도 않고 병을 이기려 하다기 그건 아니지 않느냐고 타박을 했다. 물론 나 들어라고 한 소리겠지. 잠결에 다 들린다. 그냥 미안하긴 한데, 지금 내 상태가 더 괴롭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는데 모두 잠들어 있다. 나도 조금 나아진 것 같다. 하지만 거실을 걸어 나가는데 어질어질 혼자 걷기가 쉽지 않다. 소변을 보는 것도 온전치 않았다. 세상에! 내가 이런 신세가 되다니. 이럴 수가 있다니. 혼자 소변을 보는 것도 이렇게 불편할 수 있다니.


다시 침대에 돌아와 누웠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수건을 찬물에 적셔 이마에 둘렀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이마에 열이 내리면서 잠을 조금이라도 이룰 수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새벽에 한번 일어나 소변을 보고 다시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순식간에 잠들어 버렸지. 참 희한하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은 상황이 너무나도 특이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불면증과는 전혀 담을 쌓고 살았다. 어디든 머리만 대고 눈을 감으면 순식간에 잠이 들었는데. 지금은 새벽에 눈을 뜨고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도대체 잠이 오지 않다니. 이런 일도 다 겪는다.


아침이 되어 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 온 아내가 날 심각하게 쳐다 본다. 밤새 몇 번이나 와 본 모양이다. 이럴 경우 일단 잘 먹어야 한다며 입맛을 돋우는 음식을 하기로 했단다. 얼큰한 떡볶이, 낙지 연포탕, 고추찜, 물미역 무침 등을 순식간에 만들어 식탁에 올려 놓았다. 아침에 자리에서 나와 아내의 정성에 부응하는 마음으로 숟가락으로 밥을 들었지만, 평소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들인데도 영 입맛이 없다. 그래도 먹지로 몃 출 들었다.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다시 침대에 들어가 그냥 누웠다. 그놈의 고량주가 문제지. 이건 아내에게 차마 말도 못하고. 그 선배들이 문제야. 아니야 그런 말을 듣고 그 독한 고량주를 몇 잔 마신 내가 가장 큰 문제지, 책임을 누구에게 미룬다는 거야. 혼자 온갖 생각을 다 해본다. 상상의 세계로 날아갔다. 다시는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안 할 거다. 문제는 그 고통이 하루에 끝나지 않고 며칠 갔다는 데 있다. 콧물도 농도가 아주 심하고 기침은 왜 그리 탁하고 거칠게 나오는지 한 번씩 기침하고 00를 뱉을 때마다 목구명이 타는 듯 아팠다. 여전히 어지럽고.


이틀때 상태가 조금 나은 듯해서 아내와 아이들 모두 출근한 사이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러 갔다. 그런데 상태가 평소와 너무 다르다. 뭔가 푹신한 것을 밟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진정하고 있으니 그 증상이 가만히 사라진다. 조심조심해서 분리수거를 하고 돌아온다. 찬바람이 온몸을 휘감아도 시원한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갑자기 체중 생각이 났다. 체중계에 올라 보니 80kg 밑으로 절대 안 내려가던 내 몸이 이틀 새에 79.1kg로 거의 1kg 이상 빠졌다. 이 정도 체중 감소야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까 싶지만.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활기가 싹 사라졌다. 건강에 뭔가 문제가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입맛이 빨리 돌아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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