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길 위에 서서

by 길엽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내 인생에도 숱한 흐름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농경사회 속에서 시골 마을 전체가 대가족 같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살았고, 고교 시절부턴 고도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산업화의 물결을 경험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 졸업하고 긴 세월 지내왔다. 그리고 현직 후반부터 지식 정보화 사회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라고나 할까. 수출강대국, 무역 대국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우리 사회의 경제 수준도 세계 최상위 급으로 발돋음한 듯하다.


언젠가 아프리카에서 인근 대학에 유학 온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 나라 중고등학교 교사 월급액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정말 상상 외로 급여가 낮았다. 물론 그 나라의 물가 수준을 감안하면 그 월급으로 생활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일정액의 월급을 받아 자기 나라로 송금하면 온 가족의 삶의 수준이 일거에 높아진다는 사실도 들었다. 자기 한 몸 희생하여 가족의 삶을 책임진다는 말을 접하면서 1970년대 서독에 광부, 간호사로 파견되어 온갖 힘든 일을 다했던 선배들을 떠올렸고, 중동 사막 열사의 나라에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며 일했던 사람들의 지난한 삶도 생각났었다.


이제 돌아보니 그런 일들도 아득한 꿈속 너머 추억으로 느껴진다. 내가 직접 현지에서 가서 그 힘든 노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 그런 사실을 뉴스로 접했을 때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생각을 많이 했었지. 그런데 이젠 우리 나라도 어엿한 선진국이 되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생활 수준을 마음껏 누리는 시대가 되었다. 지난 날의 긴 시간들을 돌아보면 내 삶에서 수많은 시대 상황을 경험한 듯하다.


이제 이렇게 길에 서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긴다. 가끔은 나이가 좀더 적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도 했다. 전혀 불가능한 희망이지만 지금 젊은 세대가 누리는 삶도 다시 한번 누리면 참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고교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대학 시절로 아니면 3~40대로, 정 아쉽다면 10년 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 선배들이 나를 앞에 놓고 그렇게 넋두리처럼 하소연을 털어놓던 일들도 떠올린다.


가끔 사람들이 그랬지. 지금 나이는 실제 나이에 0.8을 곱하라고.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람. 내 나이는 엄연한 사실이요, 현실인 것을. 하루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현실인 것을. 아하 그래서 나이가 들면 자신도 모르게 울적해진다고 했을까. 난 지금까지 좀 바쁘게 살아왔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우울 같은 것은 별론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새해가 되고 이렇게 겨울 들판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니 문득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내 삶에 벅찬 희망의 시간은 도저히 존재할 수 없게 되었네. 당장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등등 생각에 빠진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은 나를 보고 독서도 많이 하고 집필도 하니,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니 한가하거나 심심할 일이 없는 거 아니냐고 가끔 말을 한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고 나이 먹은 사람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것을 난들 무슨 수로 벗어날 수 있을까.


오늘은 차를 저만치 따로 세워 놓고 홀로 들길에 섰다. 작년과 또 다르다. 외로움과 울적함이 같이 밀려온다. 그렇다고 젊은 날처럼 누군가를 찾아가서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눌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도무지 뭔가 하고픈 일이 없다. 지난 달에는 고향 마을에 계신 형님 한 분께서 일부러 전화를 걸어와 이번 겨울에 꼭 고향에 한번 다녀 가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고향에 몇 안 남은 형님들 셋이서 고향 마을 근처 저수지 횟집에서 술잔을 들다가 문득 내가 생각났다면서 전화를 걸어왔었지. 코로나 땐 그때 이유로 왕래가 없었지만, 이젠 다녀갈 때가 되지 않았나. 자기들도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장담 못한다면서 심각한 말씀까지 하셨지. 그땐 당장이라도 시골 마을에 갈 것 같았는데 차일피일하다가 오늘까지 왔네. 나이 80을 바라보는 형님들은 나보다 더 울적했던가 보다. 이번 겨울 반드시 가보아야겟다. 그리고 그 형님들을 위해 맛나는 음식을 가득 사드리고 담소라도 나누고 와야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