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임에서 만난 후배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옆으로 다가와 조언을 구합니다. 제가 무슨 자격 있다고 그런지 몰라도 어쨌든 후배의 사정을 들어 줍니다.
"형님, 형님은 아이들 2남 1녀를 훌륭하게 잘 키워 냈으니까 제가 지금 겪고 있는 거에 대해 좋은 방법을 알려 주실 것 같습니다. 조언 부탁드립니다."
대뜸 조언을 구한다는 말부터 꺼냅니다. 딸이 중학교 3학년인데 향후 특성화 고교에 가서 댄스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부모는 일반 인문계 고교로 진학 시키고 싶은데 그집 딸 아이는 부모와는 의견이 전혀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반계 고교로 가서 댄스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후배가 제 나름의 협상안을 제시해도 영 통하지 않더랍니다.
우선 우리집 사정부터 먼저 말했습니다. 후배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집 아이들 3남매가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다. 특별히 명문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이 놀랄 정도의 대기업에 취직한 것도 아니다. 부모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도를 다하는 면에선 세상 최고의 자식들이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기준에서 훌륭하게 키운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미리 손사래를 쳤습니다. 실제로 우리집 아이들 3남매는 지극히 평범합니다. 그래도 저와 아내에겐 세상 최고로 소중한 존재이긴 합니다. 한때는 우리집 아이들도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버젓한 대기업에 취직했으면 하고 빌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니, 그런 것은 다 부질없고. 지금처럼 집에 함께 생활하면서 가까운 곳에 근무하면서 늘 저와 아내를 챙겨주는 것이 참으로 고맙기만 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요.
제가 우리집 아이들 3남매가 평범하다고 말하자 후배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후배의 딸 아이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중학교를 다닐 적에도 공부보단 댄스나 다른 활동에 관심이 많아서 후배가 애를 많이 태운 듯합니다. 후배의 아내는 더욱 힘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진행형이란 것이 후배 부부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후배를 위로했습니다. 자식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얼마나 답답하겠나. 하루 종일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아내와 딸 아이가 의견 충돌하는 장면을 보는 후배 심정이 오죽 하겠느냐고 위로했지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후배도 죽을 맛이라고 털어놓습니다. 후배는 최근에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 제품을 인터넷으로 판매하면서 상당히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면서 딸 아이가 조금만 마음을 돌리면 좋겠노라고 하네요.
그래서 제가 후배를 위로하고 말했습니다.
"야야~, 내가 살아 보니 뚜렷한 해결책이 없더라. 부모가 물러서야지. 부모가 서두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우선은 며칠 지켜 보고 딸의 의견을 깊이 듣기만 해보게. 나도 우리집 아이들이 학창 시절 한번씩 애를 먹였을 때 힘든 적이 있었다네. 그땐 정말 참 힘들었다네. 그렇다고 우리집 아이들이 순한 아이들이라 부모에게 뭐라고 말대꾸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네. 어쨌든 집사람하고 둘이서 가슴앓이한 적이 좀 있었지. 어떻게 하다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었던 것 같네. 거의 방치 상태였다고나 할까. 아이들도 스스로 판단하고 방향을 찾아갔던 것 같네. 너무 서두르지 말게. 서둔다고 무슨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네. 내가 큰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네."
그 정도에서 대화를 끝냈습니다. 저도 내심 찜찜했지요. 이건 해결책도 아닐 뿐더러 후배에게 새로운 답답한 숙제를 던진 것 같아서요. 그런데 후배가 저와 이야기하다 보니 무슨 실마리를 얻은 것 같다면서 오히려 고맙다고 하네요.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내가 무슨 해결책을 조언으로 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후배가 그러네요. 저와 이야기하다 보니 답답한 심정이 일거에 해소되었다고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답니다. 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후배가 답답한 심정이 풀렸다니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든 자식을 키우면서 한번쯤은 그런 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순간은 정말 답답하겠지만 그때를 넘기고 나면 내가 그때 왜 그랬지 하고 후회한다는 말도 선배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지만 막상 그때를 넘기고 아이들이 30대로 접어드니까 이젠 공부보다 부모에게 잘 해주는 자식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것도 제 욕심일까요. 나이가 들어 보니 젊은 시절 그렇게 애태우던 일들도 모두 한 순간의 추억으로 다가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