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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그릇과 숟가락만 들고 오시오

퇴직한 사람이 가족 아침 식사 맛있게 준비하며

by 길엽

새벽 일찍 일어나 맛있는 국을 끓였습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직장인이라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몰래 살짝 움직이며 부엌 싱크대에 서서 가족이 좋아하는 청국장 된장국을 준비합니다. 지인이 보내준 귀한 송고버섯, 시골에서 온 각종 채소, 호박, 부추, 두부, 멸치, 청량고추, 육수 등을 고루 고루 넣었습니다. 청국장 냄새가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듯합니다. 일전에 아파트 내 김치찌개 냄새 난다고 민원이 되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혹시나 이웃들이 청국장 냄새 난다고 민원 넣을까 살짝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도 된장국 맛이 정말 좋습니다.


평소에 무슨 요리 같은 거 해본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특별한 요리 실력이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현직에서 물러나 본격적인 노년 세대의 삶을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긴 긴 세월 아내가 해준 것에 보답도 하고, 잘나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지극 적성으로 잘 해주는 우리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간간이 시도해 볼 뿐이지요. 된장국 보글보글 맛나게 끓고 있는데, 아내와 아이들 모두 깊이 잠들었네요. 하기야 아직 6시도 채 되지 않았고 다들 직장 생활로 지친 몸이니 아직 잠에 들어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조금 있다가 모두 잠에서 깨어나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밥 한 그릇과 숟가락만 들고 오시오. 아침 밥은 충분할 테니."


아내와 결혼한 지 30여 년 긴 세월 동안 저와 아이들 3남매를 위해 맛난 음식을 마련해 준 아내의 정성에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제가 없는 실력에도 퇴직 후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이 가족들에게 좋게 보였는가 봅니다. 어설픈 요리 솜씨나마 제가 해놓으면 아이들과 아내가 아주 기뻐하며 맛있게 먹어줍니다. 그리고 요즘 와서 실감한 것인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정말 맛있습니다. 잘 막었습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반응이 신통찮으면 괜히 제 자신이 좀 그렇더군요. 그리고 제가 그 긴 세월 동안 아내가 준비해 준 식사 시간에 제대로 감사 표시를 했는지도 반성해 보게 됩니다. 앞으로는 누군가 맛난 음식을 마련해 줄 때 반드시 감사 인사를 하려 합니다. 이거 정말 중요합니다.


잠깐 팔굽혀펴기 운동을 한 다음 식구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읽고 있는 책을 펼칩니다. 왕리췬 교수의 <진시황 강의> 이 책은 몇 번이나 읽었는데, 또 손에 잡았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관련 책을 찾아 읽으면서 발견했는데, 약 10년 전 서울에 출장 간 김에 서울역 지하 서점에서 구입한 748쪽의 두툼한 책인데도 홍순도 홍광훈 공저자의 가독성 높은 번역 덕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면서 순식간에 100여 쪽을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후로 몇 번째 반복하여 읽고 있는데. 진시황의 전국 7웅 병합 과정이 아주 흥미롭게 전개되어 있더군요. 표층적,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진시황의 삶의 역정을 보다 충실하게 이해하고 여섯 나라를 병탄하는 과정에서 각 나라의 리더나 참모들의 행동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알게 한 책이었습니다. 가족들이 일어나면 제가 끓인 청국장 된장국을 맛있게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갑니다. 이 책 다 읽으면 조선왕조사도 다시 펼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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