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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고향 친구 전화

by 길엽

예전에는 설날 아침엔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이 묵시적 약속이었습니다. 정초부터 무슨 전화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지요. 설 연휴 전날 완전체를 이룬 3남매가 밤늦게까지 담소에 컴퓨터 게임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정작 설날 아침엔 일어나지 못하고 깊이 잠들었습니다. 모두 조용하네요. 저 혼자만 평소처럼 일어나 아내 아침 식사 대용 죽과 해독주스 등을 준비한다고 부산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아침 대용 죽을 먹는 시간에 전 책상에 앉아 설 연휴 기간 읽겠노라고 쌓아놓은 책을 펼칩니다.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 아니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낼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젠 현직에서 물러나 독서가 큰 취미 활동이 되었기에 설령 책을 많이 읽지 못해도 책 읽기 그 자체만으로도 삶의 기쁨이 된 듯합니다.


지난 주까지는 왕리췬 교수의 <진시황 강의>를 읽고, 이번 주에는 이성무 교수의 <조선왕조사> 와 김근 교수의 <여씨춘추>를 함께 읽어 나갑니다. 이 책 읽다가 지친다 싶으면 침대에 벌렁 누워 유튜브 동영상 <펠로폰네소스전쟁사> 강의를 시청하다가 잠시 취침 그리고 다시 다른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도 비 체계적인 독서 방법을 실행하는 것이지요. 이젠 누군가의 강요로 읽는 것이 아니라서 그냥 제 편한 대로 읽어 내려갑니다. 설력 그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탓할 생각도 안 합니다. 참 <허삼관 매혈기> 저자로 유명한 위하 소설가의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도 함께 읽고 있네요. 10개의 테마로 중국 현대사 속살을 들여다보는 비교적 말랑말랑한 책입니다. <송나라의 슬픔>이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하루에 진도가 몇 장 못 나가네요. 그러면 그런 대로 내던져 놓습니다. 나이가 들어 책 읽기기 다 그런 게지요.



그리고 아파트 거실 너머 바다를 바라보는데 설날 아침 일찍부터 전화가 들어오네요. 긴급 전화가 아니면 이 시간에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에 할 리가 없을 텐데 하면서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고향 친구 이름이 뚜렷이 눈에 들어오네요. 우선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최근 소식도 주고 받습니다. 그 친구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편이지만 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를 끔찍하게도 생각해주는 고향 친구입니다. 고향 친구라 해도 몇 안 되네요. 어릴 때는 시골에 또래들이 꽤 있었는데, 긴 세월 지나면서 이런 저런 사정으로 소식이 뜸해지고 전화를 해도 어릴 때처럼 살가운 분위기가 아닌 데면데면한 분위기가 되면서 떨어져 나간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사람들과 잘 지내는 편인데도 시골 친구들이 많이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제 성격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를 깊이 생각해 주는 몇 친구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지요.


"친구야 잘 있었나. 위천 뉴우스 지금부터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한참이나 너스레를 떱니다. 저처럼 도시에 나가 있는 누군가가 부탁을 해서 그것을 해결해주었는데, 상대방이 성의가 영 없더라는 비난도 합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의 사연도 들려 줍니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조기 축구회 활동하는 자랑도 들려 줍니다. 40 50대 팀을 이겼다면서 한참이나 자랑과 설명이 이어집니다. 전 그냥 동의하는 말만 하면서 "진짜, 대단하다"만 반복했지요. 고향 마을 뉴스는 언제 들어도 정겹고 반갑기만 합니다. 한 번 고향에 다녀가지 않겠냐고 물어봅니다. 솔직한 제 심정은 지금 당장이라도 차를 운행하여 달려가서 고향 사람들과 낙동강 변 식당에서 지난날 추억처럼 민물고기 매운탕을 펄펄 끓여놓고 제가 사가지고 간 술을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외부 활동을 해야 한다면서 친구가 저를 걱정해 줍니다. 책읽고 글쓴다고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하체 근육이 빠져 제대로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면서 이제 공부 같은 거는 그만하고 몸을 돌보라고 신신당부합니다. 이 친구는 뭐라고 말을 해도 듣기 싫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평소에 그렇게 저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해마다 감자 7박스를 보내주던 친구입니다. 강 건너 유명한 고령 개진 감자를 그렇게나 많이 보내던 친구지요. 늘 저의 성공과 건강을 빌어주던 친구라서 무슨 말을 해도 제가 경청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우리집 아이들 3남매 혼인 문제도 언급하고, 우리들 나이와 건강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설날 아침 통화치곤 꽤 길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들을까 봐 아이들이 쓰지 않는 빈 냉방으로 들어가 통화를 계속합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고향 마을에 한번 다녀가야 할 듯합니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 중에 설날 아침 일찍 댓바람부터 저에게 전화를 걸어 고향 소식도 들려 주고 저를 걱정해주는 친구가 있으니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요. 제 책 출판기념회가 곧 있을 예정인데 그날 꼭 참석하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젊은 시절엔 친구의 전화는 그리 귀하지도 기다려지지도 않았는데, 이 나이가 되니 벌써부터 그런 전화가 크게 느껴지네요. 전화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젠 제가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라도 물어야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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