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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친구는 필요한 법

by 길엽

어제 토요일 밤 사람들이 가득 모인 시내를 걸어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같은 동네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어울려 놀면서 친구가 되었는데, 지금 이 순간 모두 어딜 가고 없는 거지라는 생각 말입니다. 고향 마을에선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서면 골목길에 모여 놀고 있는 또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닭싸움, 비사치기, 동네 숨바꼭질 경우에 따라서는 기마전도 했었지요. 보름달이라도 휘영청 솟아올라 온 세상이 환하면 전깃불도 필요 없이 마음껏 뛰어 놀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밤이 깊어가면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해산하였지요. 저는 그중에 좀 늦게까지 놀다가 집에 오는 무리에 속했습니다. 그렇게 늦게 온다고 해봐야 밤 9시나 10시 정도 아니었을까 싶어요.


저녁에 그렇게 몰려 나가 마을 가운데 가장 넓은 공터에 어울려 놀다가 보면 흙이 묻기도 합니다. 집에 오면 어머니께서


"야~야, 니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너무 밤늦게 놀다 오면 잠자는 시간이 모자랄 낀데 괘안나. 얼른 씻고 자거라이. 어디 다친 데는 없나. 느그들 어울려 노는 소리가 집까지 들리던데 뭐 하고 놀았노. 우짜든동 안 다치야 한데이. 얼른 씻고 자라 알았제. 저녁 먹고 배가 다 꺼져서 고플낀 데 삶은 고구마하고 김치라도 주까. 괘안나"


어머니 살아 계실 적에 '공부해라'란 말을 한번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어른들한테 공손하고 등등은 말씀하셨지만 '공부'는 입에 올리지 않으셨지요. 어머니 당신께서는 글자도 모르고 학교 문턱도 못 가셨지만 자식 교육엔 정말 헌신적이었습니다. 겨우내 들판 배추월동 짚으로 묶기 작업을 해서 받은 품삯을 모아 두었다가 제 등록금으로 내놓으셨지요. 당시엔 몰랐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시골 마을 회관에 들르면 아지매들이 수없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야~야, 니가 대학교 나오고 고등학교 선생 된 거 다 모두 느그 엄마 공이다. 그거 알아야 한데이. 월동 배추 작업할 때 허리에 짚을 가득 묶어서 한 개씩 뽑아 배추 우를 묶는데 하루 하고 나면 허리가 끊어지는 거 같이 힘들다 아이가. 그래도 니 등록금 낸다고 그 힘든 일 하루도 안 거르고 했데이. 암마 느그 엄마 그리 무리한 기 몸에 안 좋았던 거 아인가 싶어. 니는 그 은공 잊아뿌만 안 된다이."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서 오직 자식 성공만 빌었을 텐데, 성공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밤늦게까지 놀고 오는 아들이 얼마나 얄밉고 실망스러웠을까요. 그래도 단 한번도 공부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놀고 오는 아들이 잠들 때까지 주무시지 않았던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머니를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하여 보답해 드릴 수 있을 텐데 모두 부질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때 함께 뛰놀았던 또래들, 나이 한 두 살 위 아래 아이들이 동네 공터에 모이면 4~50명은 족히 되었을 터지요. 여자 애들은 공터 한쪽에서 공기놀이를 하거나 고무줄 놀이하던 것도 기억납니다. 당시 월남전 참전하는 백마부대 용사들에 대한 군가를 고무줄 놀이에 맞춰 불렀던 동네 누나들 모습도 선합니다.


'아느냐 그 이름 백마부대 용사들~~~~~달려간다 백마는 월남 땅으로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부분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나머지 가사도 있었을 텐데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누나들이 정말 즐겁게 그 노래를 부르면서 고무줄 놀이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당시 월남전에 참전하던 군인들의 심정을 함께 떠올립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요. 제 나라 전쟁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낯선 이국 땅으로 참전하고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와 죽을지 모르는 정글 속의 열악한 전쟁터를 하루 하루 생존해야 했던 군인들과 고무줄 놀이에 정신없이 즐거웠던 누나들의 정반대 심정을 함께 떠올립니다. 그렇게 저도 나이를 먹은 모양입니다.


그 많던 동네 아이들이 모두 어디 가서 살고 있는지 시간이 가도 얼굴 한 번 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같은 고향 출신으로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가 있어 위안이 됩니다. 고향에서 지내며 쌀, 감자, 콩, 참기름 등을 실어 보내주는 한 명의 친구도 참으로 고맙기만 합니다. 어쩌다 안부 전화라도 하면 가장 먼저 제 건강 상태를 묻고, 뭐 먹고 싶은 것 없냐고,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오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 친구에게 무슨 신세를 질 일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저를 걱정해 주고 성공을 빌어주는 그 친구가 있어서 참으로 고맙다는 것이지요.


나이 들수록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갑자기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친구가 된다고 해도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 함께 자라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만큼 무게감이 있을까요. 물론 도시에서 사회적인 관계로 만나 진한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고향 친구에 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도시에서 만난 지인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였지만 고향 친구 그 친구는 국민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입니다. 그래도 어쩌다 시골에 가면 그 친구가 지극정성으로 저를 챙겨줍니다. 같이 차를 타고 달리다가 갑자기 뒷 트렁크를 열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갸우뚱하는 사이에 자기 차에서 가져온 쌀 마대를 제 차에 실어 버립니다. 종이에 곱게 싼 참기름도 함께 넣어주기도 하였지요. 처가에서 해마다 처남이 쌀 네 가마씩 보내 주기에 그것만으로도 우리 식구가 일 년에 다 먹지 못하는 처치곤란한 상황이지만, 친구가 실어주는 쌀 마대는 또 다른 고마움으로 다가오지요.


고향 땅에서 저수지 가에 앉아 밤낚시를 하다가 갑자기 제가 생각난다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도 전화를 하기도 하고, 어디 놀러 가다가 좋은 곳에 이르면 다음에 기회를 보아 꼭 같이 가보자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전 이 친구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는데 그 친구는 정말 저에게 지극정성입니다. 너무 너무 고맙지요. 젊은 시절엔 그 친구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너무 고마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젠 제가 그 친구를 위해 뭘 해줄까 고민을 많이 해야 할 듯합니다. 지금까지는 그 친구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어서 앞으로도 무엇을 할까 구체적을 딱 떠오르는 것이 없긴 하지만 고민하고 생각하면 좋은 방안이 떠오를 테지요. 어쨌든 그런 친구가, 특히 나이들수록 필요한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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