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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조용한 날에

by 길엽


매주 토요일 오전엔 아내 병원 정기 물리 치료하고 돌아옵니다. 보통 때 같으면 큰아들이 저와 아내를 위해 점심 특선 국수를 미리 만들어 놓고 기다리곤 했는데, 오늘은 주말 숙박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집에 오지 않네요. 요즘 게스트하우스에 손님이 많아 만실이라고 하던데 그 영향일까요. 며칠 전에는 숙박객끼리 말다툼이 벌어져 심야에 화해 시킨다고 애먹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큰아들은 성격이 부드럽고 여유가 있어서 남들과 좀처럼 언쟁하지 않지만 숙박객 사이의 언쟁을 해결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내도 병원 다녀오자마자 미용실로 바로 가고, 딸 아이는 동료들과 대구로 연례 행사 사전 답사차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시내까지 제가 차로 태워주었지요. 그러다 보니 오늘 특이하게 집안에 저만 남았네요. 아무도 없으니 갑자기 브런치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오늘은 뭘 쓸까 고민하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토요일 조용한 일상에서 느끼는 바를 써내려 가고 싶었습니다. 브런치 스토리 덕분에 제 삶이 한결 유의미하게 변한 것 같습니다. 평소에 책읽기를 좋아하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글쓰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냥 워드에 써내려가는 것이 왠지 단순작업 같아 재미를 못 느꼈지요. 그런데 여기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 작가님들이 라이킷을 많이 해주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설령 몇 사람만 좋아요 해도 마음이 즐겁답니다. 글 솜씨가 탁월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런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 제 삶에 큰 행복입니다.


가만히 거실 너머 푸른 바다를 바라 봅니다. 이렇게 책상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하다가 침대에 덜렁 눕는 시간이 그냥 편안하기만 합니다. 동양고전 관련 책을 많이 읽고 있어서 서양 철학 관련 동영상을 일부러 시청합니다. 사고의 균형을 맞춘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하지만 역시 서양철학은 낯설고 재미가 없습니다. 동양 철학이나 역사 관련 동영상은 대개 끝까지 보지만 서양철학 관련 동영상은 시간이 좀 짧은 것이라 해도 자신도 모르게 잠들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역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접해야 되는가 봅니다. 이제 이 나이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스스로 위로합니다.


아침 일찍이 딸 아이를 태워주고 돌아와 곧장 청국장 된장국을 정성껏 끓였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아내가 이 된장국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평소에 제가 무슨 요리 솜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이렇게 시도해보니 그것도 재미있네요. 저 혼자 자뻑하는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된장국을 맛보면서 스스로 감탄합니다. "이야, 내가 만든 된장국이 이렇게 맛이 좋으네. ㅋㅋ"


이건 병이지요. 그래도 아내가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것을 보니 제 기분도 한결 좋아집니다. 저녁엔 무슨 국을 해볼까 고민도 해봅니다. 젊은 시절 좋아하던 부대찌개를 준비해 볼까. 낙지 연포탕은 어떨까. 그냥 마음 속으로만 이것 저것 생각이 맴돌기만 합니다. 요즘엔 이런 특별한 요리라 해도 준비하기가 편합니다. 마트에 가면 웬만한 것은 즉석에서 요리해 먹기 쉽도록 포장이 다 되어 있거든요. 그래도 그것에 각종 채소 버섯 함초, 두부 땡초 등을 가미하면 맛이 한결 풍부해집니다. 그래야 우리 입맛을 돋우게 되는 것이랍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토요일 오후 브런치 글을 작성하고 나면 어제 읽다 만 책 <여씨춘추 呂氏春秋>를 읽을까 합니다. 중국 최초 통일국가인 진(秦)나라 시황제 영정 (嬴政)의 출생 비밀과 연관이 있는 여불위가 천하의 재사들을 모아 쓰게 한 책입니다.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다면 상금을 내린다는 말을 할 정도로 여불위가 호기롭게 내세운 책이기도 하지요. 당시 세상 사람들이 고칠 것이 없어서 입을 다문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서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말입니다. 김근 교수의 번역 문장이 매끄러워 가독성이 뛰어납니다.


두툼한 책이라 한꺼번에 통독하는 것은 무리라서 한 챕터씩 읽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읽고 싶은 책은 책상 위에 가득 가득 쌓여 있습니다. 책 읽어나가는 실력이 매우 부족해서 안타까울 뿐이지요.


그러고 보니 노년 세대의 삶이 꼭 외롭고 고달픈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나이가 더 들어 쇠약해져서 육신을 마음대로 운신하지 못할 때가 오고 게다가 주위에 사람들이 사라져 가는 날이 되면 지금 느끼지 못한 외로움과 고통을 깊이 실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미래의 걱정을 미리 당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삶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을 읽다가 좀 지겨우면 아파트 현관을 나가서 주차장 뒤로 산길을 잠깐 걸을가 합니다. 멀리 푸른 바다를 보면서 산길 산책하는 것도 큰 매력이랍니다. 혹시 모르니 수중에 돈도 조금 가져가서 아는 사람 만나면 막걸리나 음료수라도 사서 나누며 담소할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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