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생각만큼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당사자는 남들이 알까 봐 자책하면서 힘들어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은 타인의 행위나 생각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며칠 전에 평소에 연락이 별로 없던 분의 연락을 받고 시내 번화가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늘 만나던 사람이라면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몇 년이나 소식이 없던 사람이 연락을 하면 그건 필시 뭔가 필요하거나 부탁할 일이 있다는 뜻이지요. 몇 번이나 망설였습니다. 누가 불러주면 무작정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식사 한 끼 아쉬워 그런 것도 아니라서 주저할 수밖에요. 그렇다고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해오는데 외면하기가 좀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나갔습니다.
자그마한 식당에 몇이 앉아 근황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 사람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했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면서도 궁극적인 목적이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는 좀 그랬습니다. 식사가 먼저 나왔습니다. 식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현재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뭔가 사람에 대한 불만 분노 등이 나옵니다. 저도 잘 아는 사람에 대한 불평 불만 분노가 나오더군요. 지금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과 불만의 대상자인 제 지인은 동업자였고, 최근 경기 불황으로 큰 싸움을 한 모양입니다. 수 억원을 절반 지분으로 출연했는데 부도가 나면서 동업자가 행방불명이랍니다. 상대방은 제 지인이고 지난 달에도 먼났는데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사람보다 그 지인과 훨씬 친합니다. 그래서 제가 더 이상 식사하기가 좀 그렇다고 일어서고 싶었습니다. 기껏 내 지인 욕하려고 만든 저녁 식사 자리에 밥 한 그릇 얻어먹으러 간 결과가 되니 괜히 기분이 착잡해졌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제가 잘 알고 있던 터라 더 더욱 불편하였지요. 저를 식사 자리에 초대한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일방적 주장을 늘어놓았고, 저에도 동의를 강요하는 것 같아 밥을 먹어도 전혀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기분나쁘다고 일어서는 것도 여의치 않았지요.
인간 세상사 모든 시빗거리는 반드시 쌍방 입장을 동시에 들어야 합니다. 쌍방 입장을 듣는다고 누가 옳은지 그른지 오롯이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하물로 없는 사람을 놓고 일방적인 주장을, 그것도 모든 잘못을 없는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는 듯한 이 사람의 주장을 듣기가 영 그랬습니다. 이런 경우 난감합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야 하는데도 실제로 그렇게 가볍게 처신하기가 좀 그랬습니다. 이 사람과 불필요한 감정을 만들 필요도 없었겠지요. 그냥 조금만 참고 들어준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인근 커피점으로 가자고 권유하기에 완곡하게 거절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혼자 걸어오면서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을 이해해주는 것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이번에도 이런 내용의 자리였다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괜히 자리에도 없는 제 지인 얼굴 보기가 영 쑥스러워집니다. 그렇다고 지금껏 들었던 말을 쪼르르 일러바치기도 좀 뭐했습니다. 그냥 혼자 삭히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혼자 걸어오다 보니 괜히 부아가 생깁니다. 왜 그런 자리에 털레털레 가서 앉아 맛도 없는 밥을 먹고 그런 쓸데없는 말이나 실컷 들어야 하고, 혼자 삭히면서 괜히 기분이 불편해야 하는지 착잡한 생각이 스쳐갑니다. 길가를 걸어오다 보니 어느 새 그 감정들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참 신기하지요. 겨울 바람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봄날 따스한 기운을 맞이하려는 마음 덕분이었을까요.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평탄한 인생이라 큰 갈등이나 고비 없이 편하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마흔 한 살 때 직장 동료와 언쟁한 것이 거의 유일한 싸움 기억입니다. 그것이 가장 마지막 언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언쟁도 제가 할 말이 있는 일입니다. 학생들이 학급에서 일명 '짤짤이'를 하다가 단체로 저에게 적발되어 갖고 있던 판돈 모두 압수되었습니다. 저도 실제 그 돈을 끝까지 뺏으려 한 것은 아닙니다. 선친께서 도박을 해서 집안 살림을 완전히 망친 아픈 기억 때문에 아이들의 도박 심리를 자제시키기 위해 판돈을 압수한 다음에 하교할 때 도로 내주려 했었지요. 그전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냥 아이들 모아놓고 도박의 위험성, 특히 중독성을 강조하면서 앞으로는 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설득했습니다. 아이들도 제가 평소에 판돈을 압수하여 하교할 때 내주는 알기에 별로 걱정도 하지 않고 주의를 주는 제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면서 다시는 조심하겠다고 약속은 합니다. 또 다음에 하다가 적발되고.
그런데 제 책상 위에 아이들 판돈을 압수하여 책 위에 올려 놓았는데, 참으로 철없는 동료가 판돈 일부를 가져가서 제 마음대로 아이스크림을 몇 개 사먹어 버렸습니다. 참 어이가 없더군요. 그래서 한 마디 했습니다.
"아니 아이들 집에 갈 때 다시 돈을 돌려줘야 하는데, 어떻게 말 한 마디 없이 아이들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먹습니까. 너무 한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그 동료가, 따지고 보면 동료 자격도 없는 사람이 제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놀지 않고, 사람이 너무 맑으면 친구가 없다."고 . 아니 그것이 이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기가 찼지만 그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그것이 누군가의 마지막 언쟁입니다. 물론 그보다 젊은, 더 어린 날에는 싸움도 꽤 많이 했지요. 어쨌든 마흔 한 살 언쟁 이후로 누군가와 목소리 높여 싸운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싸운 것이 아니지만 불편한 마음이 분명 있었지요. 누군가를 이해해 준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는 않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인생살이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렇다고 매사 따지면서 살기엔 인생이 너무 척박한 것 아닌가요. 우리 같은 노년 세대에게 남을 이해한다는 것을 결국 내 마음 편하자는 것에 큰 목적이 있지요. 남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남의 입장을 깊이 들어준다면 웬만한 갈등이나 어려움은 해소할 수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우리네 인생에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