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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r 10. 2024

연작안지홍곡지지 (燕雀安知鴻鵠之志)

제비나 참새가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참새나 제비 같은 조무래기 새들이 기러기나 백조 같은 큰 새의 뜻을 어찌 알리오.


통상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리오"라고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불후 역사서 『사기(史記)』 중에 「진섭세가(陳涉世家)」에서 유래한 말이다. 세가(世家)는 분봉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 기술한 것으로 총 30권이다. 그래서 흔히 30세가라고 한다. 황제에 관한 기술은 본기(本紀)인데 사기에선 12본기가 실려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여 후대인들에게 흥미를 많이 주는 70열전(列傳)이 널리 읽히고 있다. 어쨌든 진섭세가는 30세가 중 18번째로 진섭과 오광의 전기이다. 진섭은 진승이라고도 한다.


진(秦)나라가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국가지만 진시황 사후 15년 만에 급격하게 붕괴해 버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혹한 법률도 그중에 하나로 꼽힌다. 변법개혁의 주창자로 진나라를 서쪽 변방 외진 곳에서 중원으로 진출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던 상앙(商鞅) 이래 진나라의 법치주의는 진시황 때에 이사(李斯)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했다. 문제는 이 진나라 법률이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점이다. 진시황이 죽은 다음 해인 B. C 209년  하남성 출신 진승(陳勝)은 동료 오광(吳廣) 등 징용된 900여 명과 함께  북방이자 지금의 베이징 부근인 어양(漁陽)으로 수자리하러 가는 중이었는데, 기현(蘄縣)의 대택향(大澤鄕)에 이를 무렵 큰비가 내려 도로가 끊어지고 말았다.


북방에 수자리하러 가던 진승과 오광 인솔의 900여 명은 설령 북방 어양에 도착해도 기일에 맞추지 못해 참형을 당한 판이었다. 당시 진나라 법률이 그랬다. 이대로 가도 죽고 안 가도 당연히 처형당하는 상황이니 이판사판의 심정이었다. 진승과 오광이 기현(蘄縣)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이 멸했던 이전 전국시대(戰國時代) 6국의 귀족들도 잇달아 봉기하여 독립을 추구하게 된다. 진섭 같은 농민군 수장이 제후 반영이 아니기 때문에 세가(世家)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세가에 포함시켰다. 스스로 장초라는 나라를 세워 왕위에 올랐다곤 하지만 온전한 왕이 아니었다. 더욱이 황제가 봉한 제후도 아니었다. 제후가 아님에도 세가에 포함된 인물이 또 있으니 바로 공자(孔子)이다.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孔子)와 진섭(陳涉)을 세가(世家)에 포함시켰던 것은 공자가 혼란한 세상에서 왕도(王道)를 세우기 위해 의례와 법도를 세웠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고 , 농민 출신인 진섭이 진(秦)의 폭정에 처음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진섭(陳涉)은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진(秦)에 맞서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로 칭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진(秦)을 압박했다. 한때 기세를 올렸지만 여산릉에 끌려온 죄수들 중심의 장함(章邯)의 진군(秦軍)의 공격으로 전쟁에 패해서 결국 반란이 실패하게 된다. 진승 자신도 마부 장가(莊賈)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진(秦)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끝내 멸망하였다. 진섭과 오광이 주도하는 농민군의 반란이 실패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반란이 결과적으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태사공자서(太史公 自序)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걸(桀)과 주(紂)가 왕도를 잃자 탕왕과 무왕이 일어났고, 주(周) 왕실이 왕도를 잃자 <춘추(春秋)>가 세상에 나왔다. 진(秦)이 바른 정치를 잃어 진섭(陳涉)이 들고 일어났다. 제후들도 따라서 반란을 일으키니 바람과 구름이 몰아치듯 마침내 진(秦)이 멸망하였다. 천하가 진(秦)을 멸망시킨 발단은 진섭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제18편 ‘진섭세가(陳涉世家)’를 지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진(秦)나라는 수백 년이나 지속된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 천하를 통일했다.  진나라는 B.C 361년 25대 효공이 변법을 시행한 이래 B.C 221년 31대 진왕 영정(嬴政)이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140년 동안 7대의 왕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500년간 지속된 제후 간의 분쟁을 종식하고 여러 민족이 하나 된 통일제국을 세워 찬란한 중국 문명의 기초를 닦았다. 서부 변방 외진 곳의 야만 국가였던 진나라가 진목공과 백리해, 진효공과 상앙, 혜문왕과 장의, 진소왕과 범저 장양왕과 여불위 등의 뛰어난 군주들과 특급 참모들의 혁혁한 공로로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진동시켰다. 물론 여기 언급한 군왕이나 참모들 외에도 탁월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진시황에 들어와 이사(李斯) 등의 보좌에 힘입어 천하를 통링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긴긴 세월 수많은 군주들과 참모들 그리고 천하 인민의 노력으로 최초의 통일국가를 만들지만 진시황 당시의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15년 만에 망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 사례이다. 전국 시대 7웅의 하나였던 진나라 영정이 다른 6국을 멸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중국 문명의 발전을 앞당겼다. 진시황으로 즉위하여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을 설치했고 문자, 화폐 및 도량형 등을 통일하여 2000년 중국의 역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공로도 분명 있다.


천하 대제국 진(秦)나라의 패망의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 바로 진승 오광의 900여 농민군의 반란이었다. 가혹한 진나라 법률에 따른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하여 망국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탓도 겄을 것이다. 농민 반란의 주역 진승이 양성(陽城)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여 진승이 일하다가 탄식하면서  “이 망할 세상 확 바뀌야지. 도대체 살 수가 없네."라고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자 함께 있던 머슴들이 진승을 보고 비웃어 버렸다. 머슴 주제에 뭘 어떻게 할 수가 있냐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그라자 진승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후대에 유명한 말이 되었다. 그릇이 극히 적은 존재가 큰 뜻을 가진 자를 헤아릴 수 있느냐는 천하 명언이었다.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오.燕雀安知 鴻鵠之志”


이 명언과 더불어 진승이 했다는 유명한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가 있다. 왕후장상에 씨가 있더냐 누구든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후에 고려 무신 정권 시절인 1198년(신종 1) 최충헌의 사노(私奴)인 만적(萬積)이 노비신분 해방운동을 전개하며 일어설 때 구호이기도 하다. 머나먼 북방까지 수자리 가던 농민들이 큰 비를 만나 가혹한 진나라 법륭에서 정한 기한까지 도저히 갈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진승이 제창한 왕후장상영유종호는 당시 900여 명의 마음을 격동시켰을 것이다. 비록 그 반란이 실패했을 지라도 말이다.


어쨌던 연작안지홍곡지지는 '제비나 참새가 어떠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오'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제비나 참새는 소인을 가리키며 소인배나 하찮은 사람을 의미하고, 홍곡은 군자나 큰뜻을 품은 서람을 의미한다. 소인이 대인의 원대한 뜻을 헤아리지 못함을 이른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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