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어느덧 지나가고 봄날이 우리들 곁에 와 있습니다. 따스한 봄 기운은 완연한데 기다리는 본격적인 꽃소식은 좀더 기다려야 하는가 봅니다. 지인들이 SNS에 봄꽃 소식을 알려 줘 봄날이 곁에 와 있는 것을 실감합니다. 조금만 있으면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곳에도 대문의 장면처럼 꽃들이 만발하겠지요.
한창묵 저 <혼자여도 괜찮아> 책을 읽다가 가만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제 성격 상 혼자여도 괜찮아는 지금까지의 제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거리간 먼 화두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이런 단어와 문장이 가슴 속 깊이 들어옵니다. 인생에서 '혼자'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단어입니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였습니다. 그 혼자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부모의 만남이 있었을 테고, 부모님이 만나기 전의 긴 시간 인연이 존재했기에 지금의 나 '혼자'가 가능했을 터.
세상에 나서 살아가는 숱한 날들 속에 언뜻 겉으로 보면 남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혼자'가 아닌 듯 느껴지지만 우리네 대부분 삶의 시간은 결국 혼자가 됩니다. 지인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게 먹고 마시며 흥겹게 놀다가도 집에 돌아올 때는, 집에 도착해서 방문 열고 불을 켤 때는 불현듯 혼자임을 실감하지요. 그렇게 혼자가되어도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이들과 따뜻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는 시간 상 혼자가 되어도 잠을 잘 자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타인들과 인간 관계가 특정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혼자'가 숙명적인 단어일지 몰라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혼자가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의 유의미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폴 요하네스 틸리히가 혼자 있는 시간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한창묵의 저서 9쪽에서 재인용)
외로움(loneliness)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한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solitude)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헌하기 위한 말이다.
즉, 외로움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혼자 있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혼자 있게 되는 경우이므로, 우울과 불안이 동반되어 고통스럽다. 고독은 '자발적인 고립'을 의미한다. 스스로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상태이므로 자유로운 감정이 동반되어 즐겁다. 인생은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바뀐다.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움을 잊기 위해 사용한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외로움은 무의미한 크론노스의 시간이고, 고독은 기회인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인간의 뇌는 무리에 있을 때보다 혼자일 때 높은 집중력을 발휘한다. 무리 속에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의식해야 하므로,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혼자'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참으로 다양하지만 결국 우리 인생에서 그 '혼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느냐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봄날 꽃길을 따라 혼자 걸으면서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래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막연하게 여겨졌던 삶이 혼자 걷다 보면 좀더 명확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혼자 걸으면서 고독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지요. 더욱이 봄날 따스한 꽃기운이 만발한 들길을 홀로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도 좋습니다.
요즘 와서 '혼자', '홀로'라는 단어에 관심이 많아집니다. 나이 탓이겠지요. 다른 사람과 관계도 원만하고 모임도 여럿 참가하면서 조금은 바쁘게 살아가면서 '혼자'라는 것을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문득 문득 '혼자'구나 하는 생각에 젖어들 때가 많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아이들 3남매와 함께 오손도손 살아가기에 가정 내에서 변방에 처해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힘들게 사는 노년 세대에 비하면 제 삶은 행복한 편입니다. 3남매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큰아들과 딸 아이는 같이 살면서 가까운 직장으로 출퇴근하기에 '혼자'의 심각성을 느낄 정도는 아닙니다.
대기업에서 고위직으로 근무할 정도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상당한 연봉을 받았지만 퇴직 후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하루 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분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안타까운 현재 상황을 접하니 참으로 안타깝더군요. 경제적으로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젊은 날 가족을 위해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는데 어느 순간 가족 내에서 소외당한다는 것을 경험했을 때 정말 힘들다고 털어 놓습니다. 퇴직 직후엔 그 동안 같이 못간 부부 여행도 하고 맛집을 찾아 외식도 자주 했답니다. 그런데 퇴직하고 몇 개월 지나고 나니 부인께선 거의 매일 집을 나가서 친구들 만나고 밤늦게 귀가한다네요. 1남 1녀 자제분들은 공부를 잘 해서 수도권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뒤 둘 다 서울에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어려움이 없을 듯한데, 넓은 집에 자신만 덩그라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어쩌다 부부가 집에 같이 있을 때도 각자 방에서 각자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커피도 본인이 타서 마실 때는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했기에 이런 생활을 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을 크게 느낀답니다. 부부가 대화가 뜸할 뿐이지 그렇다고 무슨 갈등이 있어서 부부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라니 얼마나 답답할까 싶습니다. 젊은 시절 잘 나갈 때를 회상하면서 당시엔 그저 열심히 살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네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대화를 하려고 부인께 무슨 말이라도 걸면 너무나 영혼없는 답만 돌아와서 그냥 힘빠지고 말았답니다. 참 특이한 외로움으로 보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