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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29. 2024

건강하셔야 편들어 드리지요

고연령 아파트 경비원들 촉탁 연장근무에 동의하고

제가 사는 아파트의 경비원들은 대부분 현역에서 물러난 분들이고 경비 경력이 꽤 오래되었기 때문에 60대 70대가 많습니다. 6개월마다 촉탁 연장 근무로 계약을 갱신하기 때문에 입주자대표회의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달에는 어느 동대표님의 강한 발언이 나왔습니다.


"우리 아파트에도 젊은 직원들을 경비로 뽑아야 않겠습니까. 좋은 뜻으로 나이 많은 분들 계속 연장 근무 계약을 해주는데 몇 살까지 해야 합니까. 적어도 70세면 70세 75세면 75세 제한선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번에 모든 경비원들 무조건 연장 근무에 동의하지 말고 부분적으로 몇 사람만 연장 계약하면서 현재 계신 분들을 차차 내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일 나이 많으신 74세 000 이분은 이번에 반드시 내보냈으면 좋겠습니다. "


회의장 분위기가 싸해집니다. 회의를 진행하는 제 입장에서도 난감하더군요.  그 말씀도 일면 타당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참석하신 동대표님들 전원의 의견을 돌아가며 모두 청취하기로 하고 발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동대표 전원은


 "나이가 무슨 상관 있습니까. 입주민들이 나이가 가장 많은 000 님을 가장 좋아하고 신뢰하는데 나이를 들먹일 필요가 있을까요. 본인이 건강이 좋지 않으면 알아서 나가시는 거고,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내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6개월 촉탁 근무 계약 아닌가요."


라는 어느 대표님의 의견에 동의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느 동대표님은 이렇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나이, 나이 이야기하지 마세요. 내 딸이 사는 아파트에 놀러 가보니 거기는 80세 경비원도 계시데요. 그런데 그분 건강하게 활동 잘 하고 있던데요. 요즘 시대 나이로 경비원들을 뽑니 마니 하면 우리 아파트에 대한 이미지가 오히려 나빠집니다. 그리고 나이 젊다고 경비 일을 열심히 한다는 보장도 없어요. 최저시급을 받는 월급 받고 젊은이들이 올 리도 없지 않나요."


제일 처음에 강경한 발언을 한 동대표가 오히려 머쓱할 정도로 전체 분위기가 촉탁근무 연장 계약에 동의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당연히 전체 분위기에 따라 찬성하였지요. 약간 웃기는 것은 강경한 발언을 하신 그분은 75세인데 지금 다른 아파트에서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매몰차게 발언을 하셔서 살짝 지적하려다 참았습니다. 같은 입장일 텐데 뭐 그리 쌀쌀맞게 발언했을까요.


회의를 마치고 경비실로 갔습니다. 74세 000 경비원께서 제 표정을 살핍니다. 아무래도 당신의 촉탁근무 연장 계약이 어떻게 결론 났나가 궁금하셨겠지요. 그래서 단번에 말씀드렸습니다.


"동대표님들 전원이 000 님을 비롯한 현재 근무 중인 경비, 청소원 전원을 연장 근무하는데 동의하셨습니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이가 더 많으셔도 지금처럼 입주민들의 인정을 받으시니 건강만 하시면 저희들과 계속 같이 갈 겁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셔야 편을 들어 드리지요. 늘 건강을 잘 챙기세요. 평소에 워낙 열심히 근무하시니 입주민들이 좋아하시고 동대표님들도 그렇게 말하네요."


아마도 이번엔 연장 근무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바싹 긴장하고 있다가 제 발언을 듣자마자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이 아파트에 근무하신 지 10여 년이 넘었는데도 나이 때문에 연장 근무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겠지요. 심야에는 저도 가끔 경비실을 방문하여 간식도 사드리고 대화도 나눕니다. 대화라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이 거의 70% 정도가 됩니다. 저보고 앞으로 계속 동대표를 맡아 달라고 하십니다. 제가 회의 석상에서 일방적으로 편들어 주는 것을 아시는가 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편들어 드린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말이지요. 아마도 아파트 관리소장이나 다른 동대표님들이 그 사실을 이 경비원께 전해드렸을 테지요.


젊은 시절 사업을 하시다가 실패하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오셨는데, 10여 년 긴 세월 입주민들의 한결 같은 사랑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설, 추석 명절에는 경비실에 선물이 가득 가득 들어오기도 하고, 평소에도 과일이나 떡 야채 등 다양한 먹거리를 선물로 받고 있습니다. 저와 대화를 할 적에는 당신의 젊은 시절 잘 나가던 때를 자랑삼아 신나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나이든 분들의 말씀을 잘 들어주니 더 열심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아이고, 또 내 혼자만 말했네. 우짜든등 고맙심더. 내 말을 이리 길게 들어주어서."라고 터널웃음을 보입니다.


마침 마트에서 사온 것 중에 삼립 호빵을 한 봉지를 드렸더니, 아무 말없이 쓱 받아들기에 제가 농담을 했었지요.


"꼭 맡겨 놓은 물건 도로 받는 것처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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