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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pr 26. 2023

거짓말 때문에 큰 고생한 고향 친구 이야기

스물 두 살 겨울 어느 날에 시골집에 친구들과 모였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한 녀석이 평소에도 과장이 심하고 거짓말도 해서 우리들의 눈총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몇이 작당하여 그 친구 거짓말 버릇을 고쳐줄 겸해서 거짓 편지를 보냈습니다. 


제 생일날 고향 친구들이 해마다 우리 집에 모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닭고기를 나눠 먹었지요.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친구들 앞에 제 기를 세워주시려고 그리하셨다는데, 닭이 대여섯 마리 정도 삶았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음력 정월 열 하루 제 생일날을 유난히 기다린 이유입니다. 당시 시골에서 그렇게 닭을 몇 마리나 삶아서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어머니께서 제 생일날엔 꼭 그렇게 해주셨지요. 그래서 제 생일 며칠 전에 그 녀석에게 도착할 수 있도록 거짓 내용을  편지로 보냈습니다. 남자들이 쓰면 금방 들통날 것 같아서 대구 다방에 모여 아는 여학생에게 편지를 쓰게 했습니다. 


"00씨 안녕하세요. 스쳐가듯이 잠깐 뵈었는데, 한번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후략>"


제 생일날 저녁에 낙동강 철교에서 밤 7시에 만나자는 편지였습니다. 우리들은 그 작당을 하면서 킥킥거렸고, 그 친구가 설마 그 시간에 우리집에 오지 않고 엄동설한 겨울날 밤에 혼자 낙동강 철교로 갈 리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제 생일날 평소처럼 어머니께서 닭을 몇 마리나 삶아 상 위에 올려 놓아두셨습니다. 초저녁에 저희 시골집에 친구들이 모여 닭고기를 먹기 시작할 즈음에 그 친구가 옷을 잔뜩 신경 써서 입고 나타났습니다. 바바리 코트에 흰 머플러를 둘렀습니다. 평소에 거의 하지 않은 옷차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미리 작당하면서 여학생이 그런 복장으로 나와달라고 한 그대로였지요. 


우리들이 지금 이 시간에 어딜 가느냐고 물으면서 여기 앉아 함께 닭고기를 먹자고 강하게 말했지요. 그런데도 그 친구 혼자서 그 야밤에 걸어서 낙동강 철교로 갔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데이트 신청을 해서 만나러 간다면서 말입니다. 그가 떠나고 우린 다시 킥킥거렸습니다. 고향 마을에서 조금만 걸으면 낙동강 철교이기 때문에 멀지 않지만 겨울 추위는 사람을 고생시킬 만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을 믿고 그곳으로 갔지요. 


한 시간 정도 후에 그 친구가 우리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입술이 새파래졌습니다. 온몸을 떨면서 두 팔로 감싼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래도 우린 꾹 참고 물었습니다. 이 밤에 누굴 만나러 갔느냐고. 만나긴 만났냐고.그랬더니 그 친구가 답합니다. 


"아가씨 만나러 갔다 왔다. 큰 키에 긴 생머리가 아주 매력적이었어. 이런 촌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이쁜 얼굴이더라. 오늘은 처음 만나서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다음에 또 만나기로 했어. 진짜 잊을 수 없는 데이트였다."


그 캄캄한 밤에 어느 여자가 제 정신이 아닌 바에야 올 리가 없는데, 그 친구는 너무나도 뻔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들 모두 할말을 잃었습니다. 평소에 솔직한 친구라면 그 시간에 누가 캄캄한 곳으로 오라고 할까. 내가 미쳤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믿고 가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거짓 편지를 보냈을까 등등 분노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며 술을 마구 퍼마셔야 했는데 말이지요. 


엄동설한 그 추운 겨울남 밤에 거의 봄가을용 바바리 코트에 하얀색 머플러까지 매고 나가서 한 시간 가량 추위에 시달린 그 친구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하는 바람에 우리 모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참 세월이 지나 우리들 작당이 들키긴 했습니다. 그 여학생이 제 생일날 사준 책 안에 쪽지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 왔다가 그 책을 우연히 꺼내 읽었고 글씨체가 너무나 흡사하여 우리들을 추궁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작당했다고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지만 그 친구와 몇 달 정도 대화가 없었습니다. 


그후로 어쩌다 만나면 우리들이 모여 그 에피소드를 꺼내고 그 친구는 제발 그 이야기는 그만 하면서 우리들을 장난치듯 노려 봅니다. 그 작당을 주도한 제가 그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집안에 혼사 등이 있어 모여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옛날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다시 물었지요. 


"혹시 낙동강 철교 그때 만난 아가씨가 귀신이 아니었을까. 진짜 궁금하더라. 니 우째 생각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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