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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간 집에 있는 책들을 처리한다고 좀 바빴습니다. 퇴직한 지 2년이 지나 소중하게 갖고 있던 책들 중 90% 이상은 폐기한다는 생각으로 정리해 보니 분량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중 제 나이 스무 살 대학생 갓 입학했을 때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특별히 사주신 <창작과 비평> <국어국문학 학술 논문집> 두 질은 정말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사주신 책이라 더 더욱 고민하였습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시지 않았고 글자도 모르시던 어머니께서 어떻게 알고 그렇게 비싼 전집 두 질을 사주셨는지 의아하긴 하지만 정말 소중하게 보관했던 터라 이번에 처리하면서도 손에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얼마나 많이 망설였는지 모릅니다. 벌써 44년이 지났네요. 당시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아무리 어려운 농군 자식이라도 공부는 시켜야 한다."
그리고 제 대학 2학년 마치고 곧장 휴학한 뒤 1982년 6월 22일 군입대를 앞두고 2개월 정도 어딜 가지도 않고 농삿일을 도왔습니다. 군에 가기 전에 우리 논과 밭 잡초는 모두 제거하여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게 해드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골 농삿일이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지요. 비만 한번 와도 잡초는 다시 자라라는 법이지요. 그래도 어머니랑 둘이서 새벽부터 들에 나가 나란히 쪼그려 앉아 호미로 열심히 김을 맸습니다. 어떤 날은 낙동강변 모래사장 근처 수박밭 풀을 뽑고, 또 어떤 날은 논에 막 자라는 피도 뽑았습니다. 군 전역 2개월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췌장암 말기로 돌아가셔서 그렇게 어머니 곁에 있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시골 농삿일이 며칠 한다고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도 어머니 곁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선 제가 들려드린 <조웅전> 이야기를 진짜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일하면서 옆에서 우리집 방 한켠에 있던 누런 똥종이 <조웅전>을 재미나게 읽고 그 내용을 어머니께 들려 드렸지요. 어머니께선 제가 그 내용을 말할 때마다 좋아하셨고, 세상에서 당신의 둘째 아들이 제일 똑똑하다고 얼마나 칭찬하셨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칭찬해 주시면 또 다른 책을 읽고 또 내용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집 형제 3남매 중에 유별나게 저를 아끼고 좋아해 주셨습니다. 면 소재지 5일장에 갈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고, 대구에 있는 이모집, 외삼촌 집을 방문하실 때도 저를 앞장세웠습니다. 특히 제 대학 합격 후 이종사촌들을 거느리고 식당에서 흡사 군사를 거느린 장수처럼 위세를 보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카들 앞에서 "엽전 열닷냥, 김삿갓 방랑기"를 부르셨습니다. 이종사촌들은 유일하게 시골에 시집가서 죽도록 고생하는 이모를 짠하게 여기고 있었던 터라 그날은 정말 큰 박수로 우리 어머니께 호응하셨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저를 옆에 앉혀 좋고 흐뭇한 미소로 조카들을 보며 자랑 또 자랑하셨습니다.
이모네 큰딸이 지금도 살아계시지만 그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모 진짜 고생했데이. 그 힘들고 어려운 농사하면서 야~를 국립대학에 합격시킨다고 이모가 진짜 고생했데이. 그라고 이모 인자 아프마 안 된다. 야~가 안 그래도 효자라 카는데 야~가 이모 호강시켜 줄 때까지 아프지 말고 건강 돌봐야 한데이."
당시엔 어머니께 왜 그런 건강 문제를 꺼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어머니를 생각해 주는 걱정이라고 여겼지요. 외삼촌들, 이모들이 우리집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 손을 꼭잡고 안타까움에 우시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이종사촌 누나들 형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이종사촌 누나와 함께 오신 매형은 우리집에 들렀다가 대문을 나가면서 돌아보며 아주 큰소리로
"이모님 늘 건강하이소. 또 오께요."
라고 하셨지요.
당시 시골에서 보기 어려운 미남이셨던 아버지께서 너무나 무능하고 무책임한데다가 술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냈으니 외가 형제들은 얼마나 속이 탔을까요. 아버지 얼굴 하나만 보고 시집갔다고 하셨던 어머니께서 이못집 큰누나가 위로하는 말을 듣고 답했습니다.
"야야 나는 괘안타. 힘들마 자~가 있잖아. 그래도 내가 힘들어도 자~만 있으면 절대 안 힘들다 아이가. 자~가 내한테 정말 잘 한다. 느그들도 잘 알고 있제. 얼라 때부터 자~는 내 자태 딱 붙어서 일도 많이 도우고 재미나는 이야기도 많이 해줬다 아이가. 저~는 지금껏 내한테 한번도 함부로 하거나 말대꾸 같은 거 안 했다. 내가 하라 카마 뭐든지 했다. 자~가 촌에 와서 일을 또 얼마나 도왔는지 느그들도 잘 알제. 난 인자 괘안타. 자~만 믿고 갈란다. 느그들도 고맙데이."
그날이 우리 사촌들과 어머니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 그때는 진짜 몰랐습니다.
어머니와 있었던 사연은 참으로 많습니다. 이번에 <창작과 비평> <국어국문학 학술 논문집>을 결국 폐기하기로 하고 손수레에 실었습니다. 상당히 비싼 금액으로 산 책인데, 당시 우리집 어려운 사정에도 어머니께서 사주신 책인데 버려도 되는지 몰라. 온갖 생각이 밀려 옵니다. 책들이 오래 되어 묵은 냄새가 곰팡이균처럼 느껴져서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군입대 전 어머니와 함께 들에서 일할 때 어머니께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야야, 니 군대 가믄 쌔가 빠지게 죽도록 고생할 낀데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고 그냥 가마이 있다가 군대 가만 안 되겠나. 그라고 안 그래도 일에 지치가 힘들 낀데 그래도 밤늦게 내가 사준 책 보는 거는 진짜 보기 좋더라."
이번에 소장 책을 폐기하면서 버리기 아까운 책도 많았습니다. 90% 정도 버렸습니다. 이제 노후에 그렇게 많은 책을 집안에 보관한다고 해도 짐만 될 뿐이지요. 책들마다 각각 사연이 있는 것들인데, 한 권씩 사면서 쓴 돈도 만만찮은데 이제 이 나이에 들어서서 그것들도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파트 쓰레기 분리하는 곳에서 책을 내리니까 낯익은 아파트 입주민 한분께서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한마디 하십니다.
"밥 얻어 먹기 힘들 낀데, 밥 얻어 물라 카믄 지금처럼 열심히 집안일 도와야 됩니다 잘 하고 계시네요. 요새 매일 책 폐기하신다고 고생 많으시네. 앞으로도 밥 얻어 물라 카믄 지금처럼 열심히 해야 합니데이. 수고하이소."
저도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제 마음속으로 말했지요.
'우리집 아침 식사는 요새 내가 매일 준비하는데, 뭘 얻어묵는다 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