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얼굴들이 세월에 묻혀 사라짐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대힉동기 친구 혼사에 대구 가는 길
참으로 그리운 고향마을 달성군 논공 위천1리 (우나리)에 들렀습니다. 마을회관엔 마을 형수님들이 모여 계시다가 반갑게 맞이해 해줍니다. 형수님들이라고 말해도 대부분 70대를 넘어가는 노년세대입니다. 그리고 낯선 제수씨들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최근에 마을로 들어오신 분도 보입니다.
"요새는 와 자주 안 오는교? 벌씨로 잊아뿐능교? 부산에 동서캉 아~들은 잘 있는교?"
"아이고, 00도 인제 나이를 먹었는갑네. 흰머리 한가득이다. 하기야 인제 나이가 있는데. 내가 시집올 때 국민학교 1학년인가 했지예. 그래도 우리 마을 안 잊아뿌고 결혼식 가던 길에 잠깐 들다 보러 왔는갑네예."
어머니와 친하게 지내시던 아지매 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버리시거나 요양병원으로 가셨고, 그 다음 세대 형수님들이 여기 마을 회관을 차지하고 있더군요. 이분들 또한 70대 초중반 그리고 그 아래 부인네들이 마을 주축이 되어 낯익은 얼굴이 최근에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도 고향마을에 들르면 사촌도 아닌 마을 형수님들인데도 피를 나눈 형제만큼이나 살갑게 맞아줍니다. 음료수도 내놓고 다시 옛날 추억을 떠올립니다. 코로나 전에 마을회관에 들렀을 때 어느 형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디럼, 아지매 있을 때 디럼 하나 보고 살았던 거는 기억나는교. 그 어려운 농사 살림에 대구에다 하숙까지 시켜 줄라꼬 아지매 진짜 생고생 했다 아입니꺼. 지금에사 마음만 먹으마 다 대학가는 세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디럼 말고 대학 간 사람이 없었지예. 디럼 대학 합격하고 강가 밭도 그해 사가지고 진짜 좋았지예. 그 덕에 우리들 새댁때 여기 디럼 집에 와서 둘러 앉아 아지매가 푸지게 해주던 음식 나눠 먹고 그랬던 거 기억 나는교? 진짜 할 이야기 많네예, 그나 저나 아지매가 디럼 이런 장골 같은 모습 보면 진짜 좋아했을 낀데 그기 원통하다 아인교?"
해마다 마을에 들르면 이런 말도 많이 들었지요.
"대구 가서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집에 온다 카마 아지매 저 모티 방구돌 위에 앉아 기다리고 버스에서 내리마 가방을 끌어안고 좋아히더니 좋은 세상 보도 못 하고 그리 빨리 갔뿌서 그기 원통하지요. 아지매도 진짜 고생만 하고 가셨지예."
"그라고 내가 시집오이 디럼 인근에서 효자라고 소문이 났데예. 아지매가 진짜 디럼만 믿고 기다리며 살았다 아인교? 군대 갈 때도 '와 다른 아들은 동네 근처 부대 방위하는데 우리 아~는 군대 가야 하노. 이건 뭐가 잘못 된 거 아이가. 강원도 거~는 강원도 아~들이 지키고 여~는 이 동네 아~들이 지키마 안 되나.' 그 카믄서 우리들 앞에 디럼 군대 가는 거 진짜 원망 마이 했거든예. 그것도 알고 있는교?"
그리고 대학에 저만 간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분들은 제가 대학 간 사실만 기억하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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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인사를 나누다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요기 공터는 tv도 없던 어린 시절 마을 아이들이 달밤에 모여 놀았고, 저쯤 약간 높은 데는 아지매들이 고구마나 옥수수 삶은 것을 드시며 담소도 하시면 아이들 노는 것을 내려다 보았지요.
해마다 마을회관에 들르면 세상 버리신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 순간 그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기 집터는 제가 찾아 가면
"야야~, 니 왔나. 배 고플 낀데 이기라도 아쉽지만 좀 무라."
젊은 날 고향에 들를 때마다 골목길을 모두 걸으면서 추억을 떠올리다 여기에 왔을 때, 양태 형님 부모이신 노부부께서 먹거리 내놓고 반겨 주셨는데, 그 넓던 집이 다 사라지고 저렇게 덩그러나 집터만 남았네요. 두 분이 그 인자한 미소로 저를 반겨주시고, 비가 오던 날 처마 아래 채송화, 봉선화 꽃들도 정말 예뻤지요. 마을 전체가 남이 아니라 가족처럼 지냈고,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옆집에 가서 그 집 식구들과 밥을 함께 먹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어요. 옆집 형이 휴가 오던 날 그 집 아지매보다 우리 어머니가 더 반기고 그 형이 휴가 복귀하던 날 용돈도 많이 전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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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신 공을 제가 다 도로 받았습니다. 제 군입대 송별식이 군입대 사흘 전 1982년 6월 19일 밤에 있었는데, 우리집 마당에 덕석을 넓게 깔고 일명 호마이판을 두 줄 세 판 총 6개를 깔아놓고 그 위에 음식이 가득 놓였습니다. 동기들은 '전선야곡'을 선창하여 함께 부르게 했고, 후배들은 당시 유행하던 '일편단심 민들레야 서산갯마을'을 흥겹게 불렀습니다. 기억나지 않지만 막걸리 잔을 들고 건배한 듯하고, 저의 무탈을 빌었습니다. 6월 밤늦게까지 합창 노래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져 다들 불편했을 텐데,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셨지요. 50여 명이 그날 밤을 함께 했지요. 평소에 저 혼자 대구 시내에서 학교 다니느라 자주 못 보던 마을 여자 동기들과 후배들도 그날 둘러 앉았고, 어떤 여자애가
"야야~ 니 군대 가믄 느그 엄마는 우짜노. 매일 울 낀데. 니 대구에 가서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적에도 들일 하다가 니 이야기만 나오믄 니 언제 오나 하고 그 캤는데. 그래도 그땐 오고 싶으마 언제든지 올 수 있었지만. 군대 가므 아지매 매일 안 울겠나. 니도 마음이 좋 그렇켔다."
여자 동기기 그렇게 위로하는 말을 듣다가 마루 쪽을 바라보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루 위에 나란히 앉아 내려다보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으십니다. 저희들 대화를 들을 리야 없겠지만 대략 짐작으로 그러셨겠지요. 훗날 전역 2개월을 앞두고 강원도 최전방 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있는데, 어머니 저 세상 가셨다는 전보가 도착했을 때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곧장 부대로 복귀하고 휴가복으로 갈아입은 뒤 군용 집차에 올라타 속초 시외버스터미널, 서울 강남 버스터미널, 동대구역, 대구시내버스, 성당주차장 시외버스를 타고 달성군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모든 상황은 끝나고 덩그러니 무덤만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무덤을 돌면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지난 번 휴가 복귀하는 날 빨리 제대해서 오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가시면 저는 우짭니까."
어머니 상을 치르느라고 고생하신 형님과 형수님은 오히려 미안하다면서 저를 위로해 주었지요. 두 분의 잘못은 결코 아닌데 말입니다. 제가 입대하고 새로 지은 집 뒤안에 어머니께서 30개 월 군복무 기간 내내 정화수를 떠놓고 저의 무사 귀한을 신령님께 빌고 또 빌었던 흔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냥 왈칵 눈물이 쏟아질 듯합니다.
말년 휴가를 왔을 때, 옆집 아지매가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야야~ 내가 새벽에 밥 할라꼬 정재(부엌의 경북 달성 방언) 들어갈라 카는데, 어데서 짝은 소리가 들리기에 담 너머를 느그 집 뒤안을 살째기 쳐다 보이, 느그 엄마 뭐라 뭐라 빌면서 고개 숙여 절하고 또 절하고 그 카더라. 암마 니 군대 잘 댕겨오라는 기도 아인가 싶어. 그걸 3년이나 했다 아이가."
송별식 하던 날 마을 형수님들이 초저녁부터 대거 몰려와 그 많은 음식을 해주시며 무사히 제대해서 이 마을로 돌아오라고 빌어 주셨지요. 저도 제대하면 어머니께 더 잘 해들 것이라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인사말도 하고 그랬지요. 그리고 다음 날 군에 입대한다고 인사를 드리러 가니까 집집마다 차비하라고 용돈을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그것이 제가 잘 나서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평소 하신 은공 덕분이신 것을.
입대 전날 어머니는 제 속온 안 쪽에 바느질을 하셔서 그 용돈을 넣으며 군의 상관 누가 뭐라 해도 이 돈을 주마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리고 훌쩍 훌쩍 우셨지요. 밤늦게까지 저도 어머니도 잠이 들지 못하고 새벽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섰습니다. 밤새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저랑 집을 나서자 제 허리를 꽉 끌어안고 놓으려 하시질 않았습니다. 시외버스가 오는 정류장까지 한참 동구밖 길을 걸으면서 어머니는 조용한 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야~야, 니 잘 갔다 온네이. 으응응~, 첫 휴가 올 때까지 절대 몸 안 다치고 와야 한데이. 아이고 야~야, 니 없으마 우짜노."
저도 속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울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도저히 표시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말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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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고향 마을은 그래도 100여 세대 마을로서 비교적 큰 동리지만 집집마다 젊은이들은 거의 없고 노부부 혹은 홀로 되신 나 많은 분들이 집을 지키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마을을 벗어나 들길을 걸었습니다. 둑에 올라서니 낙동강 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황금 물결이 출렁이는 들판을 보니 어머니 살아 생전에 논에서 농삿일을 돕던 기억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등상을 받아오면 글도 모르시는 어머니께서 문 위 벽에 곱게 곱게 풀칠하여 붙여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위해 매달 우등상을 받아 드리겠다고 마음 먹고 공부하였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제 역량이 미흡하여 그 약속 모두 지키진 못 하였지만 말입니다.
타지에 살다가 귀향한 고향 후배가 마을 이장을 맡아 동네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말에 전화 통화로 칭찬도 해주었습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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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학교까지 3km여 비포장도로가 저렇게 세월을 가득 안은 거목으로 자라 길 양 옆에 정겹게 서 있습니다. 들길은 우리 가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많이걸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