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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칼럼] "자식에게 기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식도 먹고 살기 바쁘고 자기 가족 건사해야 한다

by 길엽

"네가 내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이런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 역시 당연한 의무라고 여겨지는 사회. 하지만 이런 관념이 과연 건강한 것일까.


현실은 냉혹하다. 20대, 30대 젊은이들은 자신의 생존조차 버거워한다. 취업난, 주거비 부담,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부담까지. 이런 상황에서 부모 부양까지 떠안아야 한다면 그들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워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기대 자체가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댐의 심리학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는 순간, 사랑은 거래가 된다. "내가 너를 키워줬으니 네가 나를 돌봐야 한다"는 논리는 조건부 사랑의 전형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의 선택은 언제나 부모의 기대와 요구에 의해 제약받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기대가 자식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부모에게 기댈 것을 전제로 한 자식 양육은 의존적인 인간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자식에게 기댈 것을 전제로 한 부모의 마음가짐은 자식을 소유물로 바라보게 만든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는 것인데, 기댐은 이를 정반대 방향으로 이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건강한 부모-자녀 관계는 '분리-개별화'를 전제로 한다. 부모는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정서적, 경제적으로 독립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는 관계에서는 이런 건강한 분리가 불가능해진다.


경제적 현실과 도덕적 딜레마


물론 현실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급속한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 돌봄은 중요한 사회적 과제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만 해결하려 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젊은 세대의 경제적 어려움은 통계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청년실업률, 높은 주거비, 불안정한 고용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미래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여기에 부모 부양의 부담까지 더해진다면, 젊은 세대는 영원히 현재에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악순환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부모 부양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거나 늦추는 젊은이들, 아이를 갖기를 주저하는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결국 저출산 문제까지 연결되는 복잡한 사회 구조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독립적 노후의 가치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기대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자식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독립적인 노후 준비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존엄한 삶을 위한 선택이다.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는 부모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자식과 맺을 수 있다. 부담이 아닌 기쁨으로 만날 수 있고,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소통할 수 있다.


또한 부모의 독립적인 모습은 자식에게 강력한 교육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는 세대를 이어가는 건강한 가치관의 전수다.


사회적 인프라의 중요성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다. 충분한 국민연금, 다양한 노후 보장 제도, 양질의 노인 돌봄 서비스 등이 뒷받침되어야 부모들이 자식에게 기대지 않을 수 있다.


북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강력한 사회보장제도가 가족 관계를 오히려 더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적 의존관계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순수한 사랑과 애정의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기업들도 직원들의 노후 설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퇴직연금 제도의 개선, 생애주기별 재무 교육, 은퇴 후 일자리 창출 등을 통해 개인들이 독립적인 노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새로운 가족 문화를 향하여


결국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어떤 가족 문화를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다. 의존과 부담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기댈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 이는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식은 부모의 이런 독립성을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 경제적 부양의 의무에서는 자유로워지되, 정서적 관심과 사랑은 더욱 풍부하게 나눌 수 있는 관계 말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오랜 관습과 가치관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부모 세대는 독립적인 노후 준비를, 자식 세대는 건강한 경계 설정을 배워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기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냉정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랑,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사랑. 그런 사랑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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