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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이름의 운명

by 길엽

"자식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 앞에 오면 영원한 아이인 것을"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몰랐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이토록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의 연속일 줄은.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그 벅찬 기쁨과 설렘, 작은 손가락을 꼭 쥐어주며 다짐했던 수많은 약속들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끝없는 걱정의 시작


부모가 되는 순간, 우리는 평생 걱정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아이가 아플 때는 물론이고, 건강할 때도 걱정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 공부는 따라가는지, 진로는 제대로 정했는지. 시간이 흘러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걱정은 끝나지 않는다. 직장은 구했는지, 연애는 잘하는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밤늦게 들어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마음을 졸이고, 연락이 없으면 혹시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런 걱정이 부모의 운명이라는 걸, 자식을 키워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기대와 실망의 반복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 처음에는 건강하게만 자라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면서 욕심이 생긴다.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고, 예의바르고 착했으면 좋겠고, 특별한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어느새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이가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마치 내가 시험을 본 것처럼 기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내가 떨어뜨린 것처럼 속상하다. 아이의 성과가 곧 내 성과인 양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돈과 자식, 그 미묘한 관계


젊었을 때는 자식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라고.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자식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병원비가 필요할 때, 생활비가 부족할 때, 급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자식에게 손을 벌리기는 쉽지 않다. 아니, 자식도 자식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차라리 말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돈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돈이 있으면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자식을 도와줄 수 있으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해도 결국은 다른 인격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계획한 대로 살아주지 않는다. 의대에 가기를 바랐는데 예술을 선택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원했는데 창업을 하겠다고 한다. 결혼을 서두르라고 하면 아직 이르다고 하고, 결혼을 늦추라고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내가 이렇게 키워놨더니 제 멋대로만 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는다. 아이도 자신만의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내가 걸어온 길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고마움을 모르는 아이들


아무리 퍼줘도 고마운 줄 모른다. 이건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용돈을 줘도 당연하다는 듯 받고, 밥을 해줘도 당연하다는 듯 먹는다. 빨래를 해주고, 방을 치워주고, 온갖 뒷바라지를 해줘도 감사 인사 한 마디 없다.


그런데 가끔 생각해본다.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께 그랬던 것 같다고. 부모가 해주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고.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이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고마워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보다는,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원망과 상처


아무리 잘해줘도 원망할 아이는 원망한다. 이것만큼 부모를 절망시키는 것도 없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자책하지만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특히 말보다는 등을 돌릴 때 더 큰 상처를 받는다.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면 오히려 시원하다. 감정이 표출되니까.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고 외면당할 때의 그 서늘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결국은 사랑한다. 아무리 속상하고, 화나고, 서운해도 결국은 사랑한다. 이게 부모의 운명이다.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프고 싶고, 자식이 힘들어하면 대신 힘들어하고 싶다. 자식의 기쁨이 내 기쁨이고, 자식의 슬픔이 내 슬픔이다.


가끔 아이들이 "엄마(아빠)는 왜 나한테만 그래?"라고 물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대답한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한다고.



현실적인 아이들


힘들 때는 나만 찾는다.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플 때, 돈이 필요할 때. 그럴 때는 엄마, 아빠를 찾는다. 하지만 괜찮을 때는 연락이 없다. 친구들과 놀 때, 연인과 시간을 보낼 때, 일이 잘 풀릴 때는 부모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서운했다. 필요할 때만 찾는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친구 말이 더 중요한 아이들


부모 말보다 친구 말을 더 믿는다. 이것도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듣지 않다가, 친구가 똑같은 말을 하면 "아, 그런가?" 하고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나보다 친구를 더 믿는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세대,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의 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 부모의 조언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지만, 때로는 구시대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보일 수도 있으니까.



부모라는 숙명


결국 부모라는 것은 숙명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중도에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번 부모가 되면 평생 부모다. 아이가 50살이 되어도 내게는 여전히 아이고,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내게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자식이다.


이 모든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들이 부모가 되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현실이다. 기쁨과 슬픔, 자부심과 실망, 사랑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의 롤러코스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로서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조건 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 그 사랑이 때로는 무거운 짐이 되고, 때로는 날개가 된다. 그것이 바로 부모라는 이름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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