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산업화로 인해 우리의 삶은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들이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제시한 '위험사회'라는 개념은 바로 이런 현실을 정확히 짚어낸다. 위험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사회, 그리고 그 위험의 책임이 점점 개인에게 전가되는 사회 말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위험은 후진국보다 선진국에서 더욱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첨단 기술이 발달할수록, 산업 시설이 복잡해질수록,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우리가 마주하는 위험의 종류와 규모는 커진다.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누출, 화학공장의 독성물질 유출, 대형 건물의 붕괴, 교통시스템의 마비 등은 모두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이 만들어낸 위험들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기술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사회 시스템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위험들이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이다. 매일 출근길에 이용하는 지하철이 언제 고장날지 모르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건물이 언제 안전 점검을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마시는 물, 먹는 음식, 숨쉬는 공기까지도 각종 화학물질과 미세먼지로 오염되어 있다. 이런 위험들은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위험들을 관리하고 예방해야 할 책임이 국가나 사회 제도에서 점점 개인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의 안전은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며 손을 놓고, 기업은 "소비자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며 면피한다. 결국 개인은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해서 위험을 회피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어떤 제품이 안전한지, 어느 지역이 살기에 적합한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지 등 모든 것을 개인이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
대형 사고들을 살펴보면 이런 현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세월호 참사, 대구 지하철 화재,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대형 사고들은 모두 사회 시스템과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들 사고는 기술의 부재나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안전 점검의 소홀, 규정 위반, 책임 회피, 부실한 감독 등 시스템의 실패로 인해 발생했다. 제도와 규정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것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런 사고들이 일어난 후에도 근본적인 시스템 개선보다는 개별 사건의 처리와 개인 책임 추궁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고 원인을 특정 개인의 실수나 부주의로 축소하고, 시스템 전체의 문제는 외면한다. 그 결과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그때마다 개인의 희생과 유가족의 고통만이 남는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시스템의 실패로 인한 위험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피할 수 없다.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 없이는 제품의 안전성이나 시설의 위험성을 정확히 판단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선택권 자체가 제한되는 경우도 많다.
결국 위험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석구석이 제대로 정비되어야 한다. 안전 관리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하고, 규정과 기준이 현실에 맞게 업데이트되어야 하며, 감독과 점검이 형식적이지 않고 실효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위험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부담하고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안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개인의 조심성이나 운에 의존하는 안전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보장되는 안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책임감 있는 역할,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의식, 그리고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감시와 참여가 모두 필요하다. 위험사회에서 벗어나 안전사회로 나아가는 길, 그것은 개인의 희생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