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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01. 2023

나이가 들어 보니 서운하긴 해도 누굴 미워할 수 없더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매사에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천성이 부지런하여 아침에 정말 일찍 일어납니다. 어린 시절에도 새벽에 일어나 소죽을 끓이는 일은 온전히 저의 몫이었습니다. 소죽을 끓이는 부엌은 대개 집 뒤쪽에 있어서 겨울 바람이 만만치 않습니다. 두툼하게 입고 소죽을 끓이려고 준비하면서 열심히 불을 넣지만 그래도 등 뒤는 차가운 기운이 가득합니다. 제가 새벽 5시쯤 일어나 소죽을 끓이려 뒤안으로 가면 어머니는 벌써 그 전에 일어나셔서 물 펌프 있는 곳에서 뭔가 준비하고 계시다가 저를 보고 환히 웃으셨습니다. 


"잘 잤나. 어제 늦게 잔 거 아이가. 내가 니 묵을 끼라도 좀 주고 잘 낀데, 내가 피곤했던 갑다. 배도 고프제. 느그 형은 하루 종일 들일한다고 저리 힘드니 니가 소죽을 끓이네. "


평소에 저보다 늦게 주무시고 새벽 일찍 일어나시는 어머니시지만 어떨 때는 겨울이라도 남의 집 배추밭에서 하루 종일 월동배추 작업하시느라 허리도 제대로 펴시지 못하고 일한 탓에 초저녁부터 주무시는 경우가 많았지요. 월동배추 작업해 보면 그 힘든 것 실감할 겁니다. 드넓은 배추 밭에 나란히 들어서 허리에 참 짚에서 몇 가닥 뽑아 배추 윗동을 살짝 묶어주는 작업입니다. 그러면 월동에 상당히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배추 농사 짓는 사람들은 '놉'을 사서 일을 시킵니다. 


어머니는 젊은 새댁들과 함께 일을 하면 행여나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 무리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한 달 내내 그런 작업이 이어집니다. 물론 도중에 쉬어 가면서 한다고는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노동강도가 셌을까요. 일을 한참 하는데 옆에서 젊은 아지매들이 왜 이렇게 무리하냐고 물으시면 어머니께서 답하셨지요. 


"우리 둘째 학교 공납금 만들어 줘야 한데이. 그렇게나 엄마인 나한테 효도 잘 하는 우리 둘째 이 동네서 지 혼자 대구로 공부하러 갔는데, 우리가 제대로 밀어주지 못해 공부 그만두만 우야노. 큰 아도 그렇게 공부를 잘해 중학교부터 대구에 갔는데, 즈그 아부지가 노름에 손을 대는 바람에 중학교 2학년 하다가 중퇴한 기 내 가슴에 못이 박힜다 아이가. 중학교 1학년 전체에서 1등한 아~가 계속 공부하믄 무조건 경고(경북고등학교)로 갈 낀데 내 같은 무지랭이 엄마 만나고 노름꾼 애비를 만나 저리 안 됐나. 그래서 둘째 자~는 절대 그런 거 안할 끼다. 자~ 공납금은 내가 만들어 줘야 한다 싶어서 이렇게 일한데이. 느그들 여기 십장한데 내 일 몬한다 카믄 절대 안 된대이."


"아지매, 무슨 말씀을 그리 섭하게 하십니꺼. 우리도 돈이 궁하믄 아지매한테 달려가는 판인데, 우리가 어째 십장한테 일르능교.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낍니다. 낭중에 우리 어려븐 일 생기먼 내 몰라라 안 하깁니더. 아지매 그래도 우리가 좀더 할 낀끼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이소. 낭중에 아~들한테 원망 듣습니더."


이 대화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훗날 제가 고향 마을 회관에 들러 생선회를 비롯한 음식들을 대형 박스에 싸가지고 갔을 때 그분들이 들려 준 내용들입니다. 제 어릴 때 어머니만큼이나 저를 돌봐준 아지매들이라 어머니 못지 않았지요. 그렇게 큰절 한 번하고 자리에 앉으면 돌아가면서 우리 어머니 생전 행적을 들려 줍니다. 다른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는데, 어머니란 말만 나오면 말하는 아지매도 그걸 듣는 저도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마을 회관 창문 너머 마을 뒷산을 멀리 바라보고 울음을 조금 삼킨 뒤에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도 그대로 보입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혀 버립니다. 


그렇게 월동 배추를 한 달 정도 일하셔서 모아 둔 돈은 오직 우리 3남매를 위해 쓰려고 깊이 깊이 숨겨 두었습니다. 저야 그 돈이 어디에 있는지 대충은 알았지만, 아버지가 물어도 절대 답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그 돈을 가지고 도박판으로 달려 갈까 지켰습니다. 밤늦게 제가 책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는 제 옆에 앉아 삶은 고구마나 강정 그리고 식혜 등을 가져오셨지요. 밤에는 사과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저는 사과도 곧잘 먹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어머니는 어딜 가서든 구해와서 간식으로 주셨지요. 


어머니는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저를 미소 가득한 얼굴로 한참이나 지켜 보십니다. 그리고 안방으로 가셨지요. 시골 마을 전체에서 공부라고 하는 아이가 거의 없었으니 어머니는 더 좋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무슨 공부를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어머니가 좋아하기 때문에 기쁘게 해드리려고 책 읽고 공부하며 그렇게 알게 된 이야기를 들일 함께 할 때 들려 드렸지요. 어머니가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우리 둘째가 최고 똑똑한 천재라고 수없이 강조하고. 




새벽 소죽을 끓이는 모습을 우리집 암소가 가만히 지켜 보고 있습니다. 분명 배고플 텐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순한 얼굴로 저를 바라 봅니다. 그러면 제가 그렇게 말하지요. 

"쫌만 기다리래이. 배 고프제. 다 되간다. 그라고 많이 묵으래이. 학교 갔다 오믄 꼴 마이 해가 주께. 알았제."


우리집 암소가 그렇게나 순한 소가 제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만 달랬지요. 사실 저도 배가 고팠습니다. ㅎㅎ. 아무런 표정이 없이 엄청나게 큰눈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드디어 소죽이 끓여지고 김이 무럭무럭 납니다. 소죽 통에 가득 가득 담아 줍니다. 밤새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먹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소를 기분 좋게 해주려고 조그만 기구로 소의 온몸을 살살 긁어줍니다. 가느다란 소털이 걸려 나옵니다. 가끔은 소의 목덜미를 꼭 안아 봅니다. 정말 편합니다. 소의 볼도 활짝 핀 맨손으로 마사시해주면 소가 살짝 고개를 돌리면서 저를 바라봅니다. 큰눈을 보면 세상이 가득 담긴 것 같습니다. 


소가 죽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그제서야 학교 갈 준비를 합니다. 그 전날 밤에 대충 책은 보자기에 싸둔 상태입니다. 어머니께서 해주신 새벽밥을 맛있게 먹고 책보자기를 X자로 질끈 매고 집을 나섭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 모입니다. 비포장길 3km여 거리를 걸어가면 꽤 멉니다. 어머니께서 


"야~야, 조심해서 다녀오래이. 오가는데 차 조심하고. 그라고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온네이. 차조심하고 으~잉."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이런 대화가 일상적으로 있었던 탓일까요. 요즘 제가 우리집 3남매와 전화 통화를 하거나 대화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바로, 


"차조심해라. 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한창 놀기 좋아할 때 사람들 만나 술마시고 노는 거는 괜찮은데 옆 사람하고 절대 시비 같은 거 하면 안 된데이. 조심해서 다녀온나."


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제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생활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뭔가 하고 싶은 일도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도 쉽게 생기곤 했지요. 40대 이전에는 목소리를 높여 논쟁하던 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마흔 한 살 때 직장 선배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분노하여 항의했었지요. 어린 학생에게 큰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너무 함부로 하기에 강하게 항의했는데, 그 선배가 오히려 뻔뻔하게 나와서 저도 당시 화가 많이 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면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누군가와 큰소리로 싸운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평탄하게 살아왔다는 것이지요. 


이제 본격적인 노후 세대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와 목소리 높여 싸우는 일도 모두 의미가 없음을 실감합니다. 가끔은 서운한 마음은 들 때가 있을지라도 미워하는 감정은 쉬 생기지 않습니다. 제가 인생에 도가 튼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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