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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pr 30. 2023

산길 같이 갈 수 있을까

일요일 오전 느긋한 마음으로 책이나 좀 볼까 하고 책상에 앉았는데, 아내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을 건넵니다. 


"당신 일요일 운동하러 안 가나?"

"잠깐 걸었다가 올까. 당신도 같이 걸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어디 걷기가 불편체?"

아내가 고개를 조금씩 갸우뚱하더니


"당신 내랑 산길 같이 갈 수 있을까?"

"당신 괜찮겠나. 지금 산행 가면 3년 만인데 그 동안 전혀 걷지 않았는데 괜찮을까. 나야 함께 가면 정말 고마운 일이지."


그렇게 둘이서 집을 나와 밖을 나란히 걸었습니다. 최근에 체중도 상당히 늘어 옷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푸념을 살짝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옷이야 내가 다시 사주면 되는 기고, 당신이 걸어도 괜찮은가가 문제지. 혹시라도 무리다 싶으면 빨리 말해야 된데이."


아파트 마당을 벗어나 산길에 접어들면 처음부터 상당히 가파른 길로 시작합니다. 3년 전엔 이 길을 그냥 편안하게 걸었던 아내가 오늘은 한 발짝 걸을 때마다 힘들다는 말을 연이어 합니다. 거의 걷지 않다가 이렇게 나서니 힘들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천천히 끌어 올라갑니다. 구청에서 나와 공사를 했는지 벽돌 계단으로 만들어 놓아서 걷기가 상당히 편합니다. 아내가 그 와중에 계단을 만든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저도 동의하고.


4월 마지막 날 봄 햇살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오르막이 끝나자마자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다시 이렇게 내리막으로 연결됩니다. 내리막이라 해도 경사가 그리 급한 것은 아닙니다. 아내 걸음걸이가 유난히 조심스럽습니다. 아직도 머리 부분이 맑지 못한데다 허리도 오랜 기간 아팠기 때문에 혹시나 걷다가 비틀거릴까 봐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손을 꼭 잡고 조심 조심 따라옵니다. 


옆으로 지나가는 할머니들이 우리 속사정도 모르고

"참 보기 좋다. 요리 손을 잡아주는 신랑이 있어서 좋겠다. 잘 다녀오세요."


우린 그분들께 고맙다는 표시만 하고 천천히 걸어갑니다. 부부 사이가 남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는 지금 이 상황에서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아내는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그렇게 30분 정도 걸었는데, 아내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 정도 걸은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것이지요. 사실 산행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사고 위험이 큰 법입니다. 다시 천천히 걸어내려 옵니다. 아내의 현재 상태에선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이지요. 


아파트에 도달할 즈음에 아내 등산화에 뭔가 잔뜩 묻었는데, 자세히 보니 개*입니다. ㅎㅎ. 나뭇가지로 열심히 제거하니까 아내가 쑥스러운가 봅니다. 몇 년 만에 산에 왔는데 개가 자신을 이렇게 환영해 준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아내가 2021년 10월 15일 갑자기 주저앉아 119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이래 실로 오랜 기간 코로나 백신 접종 후유증으로 애를 먹다가 요즘 조금씩 컨디션을 회복하고 오늘은 드디어 산행까지 함께 갈 수 있어서 신(神)에게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다음에는 평평한 길을 좀더 길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해보려 합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큰아들과 함께 아내가 비빔국수를 만들어 내놓습니다. 4월 마지막 날 아름다운 햇살과 함께 아내의 3년 만의 산행과 비빔국수 먹기가 제 삶에 큰 행복을 주었습니다. 



연애할 때부터 제가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결혼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책무 의식이 늘 있는 것 같습니다. 신혼 때부터 30여 년 아내는 저와 아이들에게 정말 헌신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난 날 그렇게 고생하였기에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산길을 함께 걸으면서 저는 아내 걱정에 별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아내는 뭔가 쫑알쫑알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픈 말이 많았습니다. 평소엔 수다를 떠는 스타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봄 햇살과 바다 바람이 아내의 마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라 믿고 싶습니다. 


저와 아내가 어딘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큰아들이 우리를 위해 늘 정성껏 맛난 요리를 준비해 놓는데, 최근에 직장에서 무리했는지 큰아들도 일요일 오전 내내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지요. 오늘 저와 아내가 산행을 그것도 불과 30분 정도 마치고 집에 오니 그제서야 일어난 아들이 지난 토요일 스스로 만들었던 국수 육수와 함께 비빔 국수를 만들었습니다. 아내가 주로 하고 큰아들이 거들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내가 저에게 비빔국수를 한 그릇 담아주면서 한 마디 합니다. 


"있잖아. 사실 내가 비빔국수를 먹고 싶어서 만들었거든. 당신은 뭐든 잘 먹으니까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비빔국수로 점심을 때워. 큰아들도 맛있게 먹고 영양제 좀 먹으면 두통이 사라질 거야. 신학기부터 너무 무리해서 감기 증상이 보이는데 잘 먹고 영양제 더하면 좋을 거야."


저는 지금까지 평생 음식 타령 한번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주는 대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내가 저를 놀립니다. 


"당신한테는 음식 맛을 물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어. 뭘 해줘도 그냥 맛있다고 하니까. 돌아가신 어머님께는 효자니까 그렇다 쳐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맛난 음식을 가려줄 줄 알아야 하는데, 뭐든 맛있다고 해서 별로 도움이 한 돼. ㅎㅎㅎ"


그리고 우리 가족 다섯 중 유일하게 집을 떠나 멀리 경기도 남양주 시에서 홀로 생활하는 막내아들이 가끔 집에 오면 둘러 앉아 완전체가 되는 날에는 요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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