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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pr 30. 2023

그리운 사람들

아주 오래 전 고향 마을의 추억을 떠올리면 늘 20대로 돌아갑니다. 그후로도 제 삶에 숱한 일들이 많았지만 역시 스무 살을 깃점으로 삶의 폭이 급격하게 넓어진 것 같습니다. 스물 일곱 교직에 들어 평생 편하고 행복하게 보냈으니 평탄했기에 20대에 겪은,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비롯한 실로 격동의 시기였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골에서 초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시내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세상살이 경험이 넓어지다가 스무 살 대학 시험 합격을 시작으로 제 눈에 비친 세상이 확 넓어졌지요.


1980년 대학 입학하자마자 캠퍼스 곳곳에 붙은 각종 민주화 관련 대자보들, 교수들의 강의보다 캠퍼스 잔디밭에 막걸리를 놓고 둘러앉은 학생들의 모습들, 대학 후문 식당에는 저녁마다 각종 학우회 회식, 신입생 환영회 등으로 식당에 가득했던 술과 담배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열 여덟 가지 정도로 기억나는 대구백화점 뒤 막걸리 반찬이 대구 시내 대학생들이 정말 가득 모여 앉았던 공주식당, 휴강이 매일 이어지던 신입생 시절, 전 대학 생활을 기대하고 진짜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불손하게 여겨졌던 충격 등등


1980년 5월 17일 대구 시내 중앙로에 붙은 전국대학휴교령 현수막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행여나 하고 찾아갔던 대학 후문엔 참으로 낯설기만 한 군인들과 장갑차와 함께 시험 대신에 리포트로 대체하여 리포트를 경비실에 맡겨 제출했던 경험도 지금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이 생각납니다. 풍문처럼 들려오던 전남 광주 소식은 군입대하여 만난 전남대 재학생이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가 조심스레 들려준 광주의 진실에 전 정말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훈련소 동기가 불렀던 양희은 <아침이슬>은 제 인생 처음으로 경험한 광주의 슬픔이었습니다. 신병 조교들이 노래를 시키면 우린 대부분 분위기 조성을 위해 트로트를 불렀는데, 그 동기만 <아침이슬>을 정말 곡진하게 불렀습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앚았지만 전 그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시엔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보안대에 끌려갔다는 그 동기 지금도 얼굴은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보안대에 끌려갔다면 엄청난 고문을 받았을 것이고. 


경북 달성군 시골마을에서 성장하여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소년이 그렇게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직접 간접접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대자보를 통하여 소위 '의식화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강의실은 휴강이니 도서관에 처박히거나 도서관 벽에 빽빽하게 붙은 대자보들을 읽으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왜 그런 일들만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군입대 전에는 데모도 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입대 하여 광주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접하면서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행여 아들이 대학에서 데모나 할까 노심초사하던 어머니께서 저를 시골집에 있도록 신신당부하기에 몇 개월 간 낙동강변 밭에서 수박과 배추 농사를 함께 지었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호미를 잡고 쪼그려 앉아 풀을 매면 어머니는 제 학교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해 하면서도


  "야~야, 니는 절대 데모하믄 안 된데이. 느그 둘째 외삼촌이 경찰 출신인데 더 더욱 그라마 안 된데이, 다른 사람 다 해도 니는 안 된데이. 니 우짜다가 다치믄 내가 살 수나 있겠나 생각해 바래이. 그래도 니가 여게 자태 앉아서 내캉 농사 짓고 있으니 미안키도 하지만 그래도 난 니가 자태 항쿠이 있으니 참말로 좋다 아이가."


제 삶에서 어머니를 거역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어머니께


"엄마, 엄마가 싫다카믄 데모 같은 거는 절대 안 하께. 그래도 광주에서 전두화이가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광주 시민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다 카던데 그건 아이다 아이가. 그래서 대학생들이 저리 데모를 하고 항의한다 카더라."


그러면 어머니께서


"그건 우리가 직접 본 기 아이라서 진짠가는 잘 모린다 아이가. 그기 사실이라 캐도 니는 절대 데모하믄 안 된다. 알았제. 그냥 학교 문 다시 열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으만 좋겠다. 내가 걱정이 되가 딱 죽겠다."



그것도 군입대 전까지 어머니와 시골에서 함께 지낼 때 이야기였지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대학에 돌아왔을 때 누구보다 '학문의 사회 문제 해결'의 기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현대사를 바꿀 수 있는 양대 세력이 군부와 대학생이라는 말이 당시 많이 떠돌았습니다. 저도 서서히 학생 운동권의 시각으로 세상을 재단하게 됩니다. 도시 소시민과 농민들의 소외와 고통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됩니다. 사회를 비판하는 책들이유난히 눈에 많이 들어왔고, 대학 후문 복사 가게에서 사회 비판 관련 각종 도서 복사 제본을 많이 구입했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박해서 그렇게 제본을 많이 사게 되었습니다. 


스무 살 무렵 겨울 방학 때 시골 마을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토마토 비닐하우스 특작으로 동네를 나서면 달성군 논공면 위천 들판은 하얀 비닐하우스가 가득 가득 자리잡았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새벽밥을 먹고 들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들에서 아예 살았지요. 면사무소 직원들이 동네에 무슨 볼일을 보려 해도 사람들이 집에 없으니 비닐하우스를 돌아다니며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과 둘러앉아 점심 식사를 같이 먹었습니다. 면사무소 직원들도 대부분 각 마을에서 출퇴근하여 그렇게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지요. 


면사무소 직원 한 분께서 우리 토마토 하우스에 오셔서 우리 가족과 대화를 나누며, 저에게 공무원 시험 한 번 보라고 제의하자, 어머니께서


"그깟 공무원 그거 말라꼬 하는데, 됐다. 우리 아는 고시 할 끼다. 5급 공무원 그거 하믄 평생 밥 빌어물 끼다. 씩실 집안 아재 봐라 그 나이가 되도 면사무소 호병계장밲에 몬 한다 아이가. 니는 그런 거 절대 신경쓰지 마래이. 알았제."라고 강력하게 말렸습니다. 5급이 지금은 9급 공무원이고 공무원이 얼마나 좋은 직업인지 당시 어머니는 예상하지 못했지요. 그렇다고 제가 고시에 합격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아들이 아닌데, 어머니께서 대학생만 되면 모두 사법고시,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줄 알았던가 봅니다. 


저녁이 되어 햇살이 약해지기 전에 각 하우스에 대형 거적을 덮어 줍니다. 낮에 받아둔 태양열을 밤새 보존하려면 비닐하우스 안 터널에도 작은 거적을 덮어야 하고 바깥 지붕에도 커다란 거적을 둘이서 마주 보고 덮어 가야 합니다. 비닐하우스 몇 동 지붕을 거적으로 다 덮으면 저녁 황혼이 들판으로 몰려오고 우리들 하루 일과가 마칩니다. 그렇게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제서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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