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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01. 2023

어머니 품속은 세상에서 제일 넓었다.

"디럼요! 몸 잘 챙기세이. 내가 시집 올 때만 해도 디럼 초등학교 다닐 때라 세월이 참말로 마이 흘렀제. 아지매가 세상을 베리고 나도 영 허전했지요. 아재도 살아 계실 때 나를 유난히 이뻐해 주고 그랬는데, 디럼 집 지나갈 때마다 두 분 방안에 앉아 있는 착각도 하고 그랬지요. 디럼은 그래도 아재 아지매가 고생 고생 해가지고학교 보내주고 했다 아입니꺼. 우째든동 몸 잘 챙기소. 도시에 살면 암만 캐도 여~ 촌에 보다 좋겠지요. 동서하고 아들도 잘 돌보고 해야 합니데이. 난 디럼 볼 때마다 돌아가신 아지매 생시 얼굴이 생각나구마는."


시골에 홀로 사시는 집안 형수님께 참으로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더니 대뜸 저를 걱정하는 말부터 나옵니다. 먼 친척이긴 해도 웬만한 사촌 이상으로 우리집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댁 형님도 돌아가시고 아들 딸은 모두 대구에서 살고 있으니 형수님 홀로 시골집을 지키고 계신다면서 밤만 되면 너무나 심심하고 외롭다는 말씀을 계속 하십니다. 처음엔 당신의 아들 딸들이 부자되고 잘 산다는 자랑을 죽 늘어놓다가 자신도 모르게 지금 혼자 시골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하소연을 털어놓습니다. 


"아이구, 테레비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보믄 그것도 지엽어 죽겠심더. 코로나가 아이믄 그래도 회관에 모여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는데, 코로나가 끝나도 잘 안 모입니더. 디럼은 여~ 촌에 언제 올랑교. 그래도 디럼 오신다 카믄 동네 형수들이 회관에 들다 볼 낀데 말이요. 전번처럼 음식을 마이 싸오고 그래 하지 않아도 괜찬으이 가끔 오소. 코로나 코로나 그케싸도 인자 다들 나이도 많아서 그냥 내 몸도 언제 갈지 모르니 얼굴 자주 보도 못할 낀데."


형수님께서 시집 오실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고향 마을에서 워낙 이쁜 처자가 시집 왔다고 우리가 그집에 몰려가 형수님 얼굴도 보고 그랬지요. 진짜 이뻤습니다. 그리고 성품도 온화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많이 얻었습니다. 시부모 잘 모시고 농사도 열심히 하면서 마을 부녀회 일도 곧잘 맡아서 사람들이 정말 좋아했습니다. 형님도 어딜 가도 늘 형수님을 대동하고 나서길 좋아하셨지요. 부부 싸움도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답니다. 가끔 우리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를 칭찬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지매, 디럼 학교 잘 다니고 말썽도 안 지고 그라이 좋지예. 아지매한데 진짜 잘 하고 집에  농사일도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하던데."


어머니께 무슨 부탁을 하러 온 모양입니다. 정말 예쁜 형수님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땅바닥에 발로 글씨만 썼습니다. 두 분이서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집에 오신 이래 자주 왕래하셨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댁 형님과 형수님을 정말 이뻐라 하셨습니다. 그때가 벌써 50년이 넘었네요. 이젠 그렇게 꽃같던 20대 형수님께서 지금은 70대 후반 할머니가 되셔서 오히려 저의 건강을 걱정해 주십니다. 



가끔 고향 마을에 들르면 회관에서 음식을 내놓고 앉으면 부엌 싱크대에서 뭔가 요리하시다가 나와서 저에게 뭐든 먹이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가 


"아이고 형수님 시집 올 때나 지금이나 참 이쁩니다."


형수님은 좋아라 하시면서도 


"아이고, 디럼 무슨 그런 말씀 하시능교. 인자 나도 파이다. 내일 모레는 80이다. 우짜노. 70에 80에 이쁘마 얼마나 이쁘겠능교? 그나 저나 여~ 이렇게 오이 아지매 생각 마이 나지요?"


그래서 제가 형수님들이 둘러 앉은 자리에서 말했지요. 


"제가 살아보니 세상에서 우리 어머니 품속에 최고로 넓은 것 같습디다. 제가 학교 다닐 적에 공부를 조금만 잘 해도 몇 번이나 안아 주셨고, 오랜만에 대구에서 집에 오면 마당에서도 마루에서도 자주 안아 주셨습니다. 아이들과 남의 집 땅콩을 서리하거나 과수원집 자두를 따먹다가 아니면 스기야마 상 댁 뽕나무 오디 따먹다가 들켜 단체로 혼날 때도 어머니는 저를 꼭 안아 주셨습니다. 다음엔 그러지 말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어머니 말씀을 따랐습니다. 잘 해도 잘못 해도 어머니가 안아주시던 그때가 정말 보고 싶네요."


지금 사람들과 유연하게 잘 지내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머니 살아 생전에 주신 사랑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시지 않아 배운 것도 별로 없으셨지만, 자식을 위해 정말 희생하셨지요. 그리고 한없이 자식들을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잘 몰랐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머니 품속의 넓이가 얼마나 장대했는지 깊이 깊이 실감하게 됩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따뜻한 어머니의 미소, 어머니의 품속 어린 저에게 끝없이 솟아나는 삶의 원천이었습니다. 제가 달려가서 어머니께 안아달라고 했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무작정 안아주셨지요. 


웬만한 교육학 전공 교수보다 현명하셨던 어머니의 교육행동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말씀이 없이 그냥 자식들을 끝없이 사랑하시면서 안아주기만 했는데도 너무나 좋았지요. 꾸지람이나 질책은 제 평생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버지께는 맞기도 하고 혼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께 그렇게 뭐라고 들었던 말은 기억이 거의 나지 않습니다. 집에서 물펌프를 물을 올려 빨래하다가도, 들일하시면서 하루종일 힘들어도, 어디 외출했다가 집밖에서 우연히 만나도 아주 반갑게 오셔서 저를 꼭 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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