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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03. 2023

소 풀뜯기기 추억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 동네 아이들 대략 40명 정도가 소를 몰고 꽤 높은 뒷산에 오릅니다. 점심을 먹은 오후 내내 산에서 지냅니다. 도시락을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삶은 고구마에 김치를 싸서 주는 집이 대부분이었지요. 여름방학이 되지 않아도 학교에서 일찍 집에 오면 곧장 소를 몰고 산으로 향합니다. 우리집에도 암송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오롯이 저의 몫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3km 여 거리를 걸어와서 책보자기를 집에 풀어놓고 산에 올라갈 채비를 합니다. 학기 중에는 소를 맡아 풀을 뜯기기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지요. 


우리 마을에서 초등학교조차 가지 않았던 동네 누나가 우리 소를 임시로 보고 있었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그 누나는 저를 반겨줍니다. 우리집 소뿐만 아니라 일곱 여덟 마리 정도 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도착하니 우리집 송아지가 빤히 저를 쳐다봅니다. 풀을 얼마나 부지런히 뜯어먹었는지 배가 그야말로 빵빵합니다. 


"누부야 고생했제? 고맙데이. 인자 내가 볼 게. 누부야 없으면 낮에 우리 소는 누가 볼 수 있겠노? 진짜 고맙데이."


"괘안타. 니는 그래도 빨리 오네. 다른 아~들은 학교에서 바쁜가베. 그런데 있잖아 느그 소는 다른 집 소보다 풀을 더 빨리 뜯어먹는 것 같더라. 니가 빨리 오는 거 소도 아는갑다. ㅎㅎ. 고생해래이."


살갑게 맞이해주는 누나와 간단히 한 두 마디 대화를 나누고 소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갑니다. 너무나 순한 우리집 암송아지가 조용히 따라옵니다. 오리나무 밑 그늘에 송아지도 저도 나란히 앉았습니다. 가지고 간 책도 펼칩니다. 산에서 책을 읽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남의 눈치가 보여 나무 그늘 아래 숨듯이 앉아 읽게 됩니다. 당시 달성군 논공면 금포초등학교 박중쇠 교장 선생님께서 학교 대표로 달성군 학력경시대회나 고전경시대회에 참가하는 저를 교장실로 불러놓고, 


"야~야, 부모가 농사짓는다고 탓하지 마래이. 산에 소 풀을 뜯기로 가면 빈손으로 가지 말고 책을 한 권 가지고 가서 한쪽 구석에 앉아 책을 반드시 읽어라. 훌륭한 사람은 절대로 남탓 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나간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대이. 니는 내 말 잘 알아들을 끼다. 열심히 해라."


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그리고 며칠 뒤 학교에서 저를 만나면 제 손을 꼭 잡고 교장실로 데려갑니다. 아마 전국 국민학교 학생 중에 저만큼 교장실로 많이 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근황을 묻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시나부터 우리집 농사, 그리고 산에서 책을 읽었는지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까지 상세하게 묻고 나서 큰소리로 저를  칭찬해 주십니다. 책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드리면 매우 기뻐하는 표정을 보이셨지요. 과자 같은 것을 주신 것 같은데, 제가 먹었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주시면 제 책보자기에 넣어서 집에 가져와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너무나 좋아하던 그 얼굴과 교장 선생님의 인자한 얼굴이 뚜렷이 뚜렷이 떠오릅니다. 


오후 늦게 되면 우리 마을 아이들이 대부분 산에 올라옵니다.  소를 봐주던 그 누나는 한번도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러운 얼굴로 소를 인계합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넓직한 터에 있는 풀밭으로 몰려와 함께 놉니다. 그곳에서 닭싸움을 하거나 장난을 치고 그렇게 산 위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자 애들은 옹기종기 모여 공기놀이(당시 고향 마을에선 '살구'라고 했음)를 합니다. 아이들이 소를 풀뜯기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소들도 알아서 각자 자신의 일을 하는 격이지요. 소들도 여유롭게 배를 깔고 앉아 되새김질을 합니다. 서녘 하늘을 넘어가는 석양이 온 세상을 발갛게 물들이고, 하늘에 뜬 구름도 파란 배경 속에서 너무나 부드럽게 흘러갑니다. 저 멀리 일망무제로 펼쳐진 들판을 굽이쳐 흘러가는 낙동강물도, 빗겨 넘어가는 석양을 안은 봉화산도 세상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낙동강 건너 강마을엔 저녁 기운이 스며들어오는 듯합니다. 


아이들이 같이 닭싸움을 하자고 합니다. 제가 타고난 힘이 좋은 편이라 닭싸움을 하면 마지막엔 거의 저와 또 다른 누군가 두 사람이 남습니다. 저는 거의 늘 남았던 것 같고 상대방이 바뀌었지요. 이것이 훗날 군입대하여 소대별 닭싸움을 할 때 그대로 재현됩니다. 우리 소대는 저만 남았고, 상대방은 키가 작달막하고 몸이 정말 넓었으며 장딴지가 보통 아니었던 그 상대방과 상당한 시간을 두고 붙었지만 결국 제가 지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제가 비록 패했지만 그후로 중대 내에서 닭싸움 강자라고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시골에서 동네 또래들과 소풀뜯기기할 때 뒷산 그 풀밭에서 매일 단련한 덕이라고 봐야겠지요. 


우리 시골 마을에 비닐하우스 특작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그런 풍경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소 풀뜯기기 하던 그때가 정말 좋았습니다. 아이들끼리 왕따도 없었고, 누구나 친했습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해도 차별하지 않고 서로 잘해 주었지요. 삶은 고구마와 김치를 넉넉하게 싸와서 나누어 먹던 일도 떠오릅니다. 그 많은 아이들이 모두 나누어 먹은 것은 아니겠지만 행여 그날 간식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를 위해 우리 둘러앉아 나누어 먹었지요. 마을 전체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삶은 고구마, 감자 그리고 김치만으로도 큰 고생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도 가끔 마을 혼사나 조사가 생겨 만나게 되면 그 시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많이 나옵니다. 이젠 다들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저절로 추억의 시간으로 가는 것이겠지요. 참으로 다행인 것은 당시 또래들이 저에 대해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평탄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도 어린 시절 또래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재미있게 놀았던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놀러가고 싶으면 저녁 먹고 불쑥 찾아가서 밤늦게까지 그집 방에서 뒹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잠이 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아침까지 급하게 얻어먹고 집에 와서 책보자기를 급하게 챙기고 학교로 달려갔지요. 집에 가면 엄마는 아침 준비하고 있다가 저를 보고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로 반겨줍니다. 남의 집에 자고 와도 꾸지람을 하지 않고 학교 늦겠다면서,


"야~야, 니 00집에서 잤뿠다매. 아침 밥은 묵었나. 학교 늦겠다 쌔기 쌔기 가라. 책보자기는 챙겨 났제? 그칸다꼬 찻길에 막 뛰만 안 된다이. 차조심하고 갔다온나. 조심하고 알았제."


"엄마~어제 놀다가 그만 잤뿠다. 지금 학교 간대이. 밥은 아지매가 마이 주더라. 학교 갔다 빨리 오께."


그집 아지매와 우리 어머니가 서로 소통을 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심해서 다녀오란 말씀만 하셨지요. 아지매나 우리 어머니 모두 세상을 버리신 지 오래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고향 마을에 들를 때마다 아지매에게 큰절하고 앉으면 아지매는 그냥 제 등을 쓸면서,


"아이고, 야~야. 느그 엄마 살아 있으만 좋을 낀데. 니가 이렇게 잘 되~가 왔으이 좋아할 낀데. 우짜노 그기 느그 엄마 팔자고 운명이다. 그나저나 느그 엄마 없어도 밥 여~서 마이 묵고 가래이. 아이고 내 새끼야 우짜만 좋노. 느그 엄마 살아 있을 때, 저 동네 입구 모티 바우에 앉아 니가 대구에서 오는 시외버스 기다리는 기 지금도 눈에 선한데, 느그 엄마 니를 얼마나 좋아하고 의지했는데, 그냥 니 하나만 보고 살았다 아이가. 이래 되가~ 우짜노. 그래도 니는 아~들하고 색시하고 잘 살아래이. 느그 엄마 없어도 우리 마을에 자주 온네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도 된다이 옛날 맨치로."

 



산에서 함께 소풀뜯기기하던 시절은 차별도 없는 그야말로 사랑과 행복의 공동체였습니다. 같이 놀고 이야기하고 삶은 고구마를 나눠 먹었던 그 시간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존재처럼 제 가슴 속에 단단히 남았습니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누군가가, 


"야! 생각해 보면 우리 나이에 그때가 제일 안 좋았나 그쟈. 진짜 살아보이 돈도 집이고 안 중요한 기 있나 싶으지만 뭐라 뭐라 캐도 그때 우리들이 항쿤에 지낼 때가 지금 생각해 보이 진짜 좋았다 아이가."라고 합니다. 다같이 동조하는 박수를 보내고, 또 그렇게 술잔을 나누고. 


어쩌다 대구로 가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고향마을에 들러 그 추억의 시간 공간을 떠올립니다. 마을 저 뒷산은 아직도 당당하게 서 있는데, 우리들이 소떼와 함께 놀았던 풀밭엔 온갖 나무들이 꽉 들어찬 숲으로 마을을 내려다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수십 년 닿지 않아서 그렇게 무성한 숲이 되었고 숲속에서 추억의 시간들이 떠돌아 다니는 듯합니다. 마을 골목길에 들어서면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오래 전 골목길과 넓은 공터 그리고 스러져 가는 집들만 눈에 들어옵니다. 빈집에도 낯익은 문패는 보이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아 세월의 무상함을 절로 느낍니다. 저 골목에서 그 아이들이 달려나와 제 손을 잡고 뒷산으로 소풀뜯기기 하러 가자고 이끌 듯도 한데, 닭싸움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권할 법도 한데. 그만 저만 이렇게 홀로 서서 옛날 추억에 젖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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