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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07. 2023

"망증거수(妄增擧數)의 입관"이 무슨 죄일까요

천고제일의 재녀(才女) 이청조(李淸照)가 두 번째 남편 장여주를 고발하다

이청조(李淸照 : 1084-1151),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 남송(南宋)의 유명한 여류 시인이다. 특히 사문학(詞文學) 장르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사국왕후(詞國皇后)로 불린다. 그리고 시(詩), 사(詞), 산문(散文), 문학비평(文學批評) 금석고증(金石考證)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문학여성이었다. 중국 고전문학사에서 주목받는 여성 문학가로 “천고제일의 재녀(千古第一才女)”로도 불릴 정도였으니 참으로 대단한 여성이었다. 이청조는 1084년에 산동성 제주(齊州)의 문학적 가풍이 대단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진출해 있었던 부친 이격비(李格非)는 소동파의 문하생으로 사문학에도 뛰어난 학자였다. 



이청조는 첫 남편 조명성(趙明誠)으로 대부집안 출신으로 골동품 서화 수집을 좋아했다. 진한(秦漢)의 유기를 감정하는 데 능했으며, 고고학적 실물로 역사문헌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고, 지금도 수집계와 문사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제의 대저인 《금석록》을 집필한 송나라의 유명한 금석학자이자 수집가이다.



서기 1101년, 18세의 이청조는 21세의 조명성과 결혼했다.부부는 서로 사랑하며 금슬이 좋아 20여 년을 함께 살았다.1129년 8월 남편 조명성이 난징(南京)에서 병사했다.이청조는 이후 몇 년 동안 금나라 군대의 추격과 도적들이 가로막는 난세 속에서 피난을 계속하다가 서기 1132년에야 항저우(당시 이름은 '임안부')로 정착했다. 막 항주에 도착했을 때, 이청조는 큰 병을 앓고 있었다.이때 두 번째 남편 장여주가 호방하면서 세심하녀 친절한 신사적 풍모로 다가왔다. 이청조의 이복동생도 미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주도면밀한 면도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던 첫 남편 조명성과 다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지만 조명성이 죽었기에 여성 신분으로 살아가기가 벅찼다. 그런 상황에서 호감을 갖고 접근하는 장여주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에게 감동한 이청조는 서기 1132년 5월 장여주와 결혼했다.



장여주와 결혼한 후에야 이청조는 이 결혼이 처음부터 음모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청조의 전 남편 조명성(趙明誠)이 귀중한 골동품 서화를 상당수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명성 사후 이 귀중한 소장품들은 대부분 전화(戰火)로 유실되고 나머지는 이청조(李淸照)가 물려받았다. 장여주가 이청조와 결혼하려는 이유는 소장품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여주는 본색을 드러내고 이청조의 소장품을 훔쳤다. 이청조가 막아서자 장여주가 폭력을 행사한다. 사대부 집안의 학문이 뛰어난 이청조가 이런 상황을 도저기 묵과할 수가 없어서 이혼을 제기했지만 장여주는 이청조가 소장품을 넘겨주는 데 동의하지 않는 한 승낙하지 않았다. 



소장품도 보존하고 장여주와 이혼하려면 그를 감옥에 넣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떻게 함녀 장여주와 이혼하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하나의 죄목을 찾게 된다. 서기 1132년 9월, 장여주와 혼인한 지 백일쯤 되었을 때, 이청조는 단호하게 손을 써서 장여주를 "망증거수 입관"(建系入數入官)으로 조정에 고발하였다(《건염래계년요록》권58)나중에 장여주는 정말 감옥에 갇혔다. 그해 10월 장여주는 공직에서 쫓겨나 유주로 유배되었다. 이청조도 감옥에 갇혔다가 주위에서 탄원하여 금방 풀려났다. 



이청조가 장여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고발한 죄목은 '망증거수입관(增举數入官)'였다. 이건 무슨 죄목일까. 장여주는 거짓으로 서류를 위조해 자신의 낙방 횟수를 몰래 늘렸다.이청조가 장여주를 고발한 죄목은 성시(省試) 횟수를 늘려 정상고시를 우회하고 하등진사 신분을 먼저 취득한 뒤 이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는 죄목이다.여기서 '망증'은 제멋대로 늘린 것이고, '거수'는 성시(省省)에 참가한 횟수, '입관'은 관직에 들어간 것이다.



송나라의 과거제도와 관원 선발제도를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송나라에서 평민 자제가 문관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사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진사에 합격하려면 '해시' '성시' '전시'를 통과해야 한다. 명·청 양조에는 수재(秀材)가 있었는데, 수험생들은 현관(縣官)이 출제하는 '현시(縣试)', 지부(知府)가 출제하는 '부시(府試)', 학정(學政)이 출제하는 '원시(院試)'에 차례로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원시(院试)를 통과하면 수재(秀才)가 되고, 수재는 다시 성급(省級) 시험인 '향시(鄕省)'에 응시하는데 여기 합격하면 거인(擧人)이 된다. 거인은 상경하여  '회시(會試'를 하고, 회시를 통과하면 끝나면 '전시(殿試)'를 거쳐 최종적으로 진사에 합격한다.



송나라에는 수재(秀才)가 없었고, 수험생들은 주현(州官员) 관리들이 출제하는 해시(解試)에 직접 응시하여 해시에 합격하면 거인(擧人)이라 불렸다. 그런 다음 상경하여 중서성으로 가서 예부 관리가 주재하는 성시(省試)에 참가하여 합격하면 '공사(貢士)'라 하였다.공사는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에 참가해야만 진사의 신분을 얻을 수 있다.



시험 단계만 보면, 명나라와 청나라의 현시, 부시, 원시, 향시, 회시, 전시 등 총 6급이 있었고, 송나라는 해시, 성시, 전시 등 총 3급만 있었다. 송나라의 과거 시험은 명청 양조보다 훨씬 쉬웠다. 문제는 송나라가 성시(省这) 급에서 탈락률이 매우 높아 100명의 수험생 중 단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수험생들은 장기간 수도에 머물며 해마다 복습과 시험을 운에 맡기게 된다.그중 일부 수험생들은 시험에 떨어지면 조정에 불만을 품고 위험을 무릅쓰고 봉기와 반역까지 감행한다. 북송 전기에 장원(張元)이라는 수험생이 있었는데, 매번 낙방해서 화가 나서 서하로 도망갔다. 그리고  서하 수령의 모사가 되어 서하 군대를 이끌고 대송을 공격하여 조정에 큰 문제가 되었다.



이를 감안해 북송 황제는 여러 차례 낙방한 수험생들에게 벼슬할 수 있도록 작은 여지를 주었다. 예를 들어 북송 중엽에는 40세 이상 수험생이 9회 이상 성급 시험에 떨어지거나 50세 이상 수험생이 6회 이상 성급 시험에 떨어지면 조정에 신청해 일종의 '특주명(特奏名)' 전시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전시는 여전히 황제가 직접 주관하지만 문제는 정상 전시보다 훨씬 간단하고 쉽다.여러 번 낙방한 수험생들은 성시도 치르지 않고 정상적인 전시를 회피한 채 직접 특주명전시(特名名殿試)에 응시하는데, 서예가 깔끔하고 문리가 매끄럽고 큰 착오가 생기지 않는 한 하등 진사의 신분을 얻을 수 있다. 단 이런 시험으로 따낸 하급 진사는 벼슬을 할 수 있지만 진급은 정상적인 경로로 합격하는 진사보다 어렵다.



이청조는 기록에서 장여주가 그 해 성시에도 여러 차례 낙방했고, 특주명전시(特名名殿取得的)를 통해 얻은 진사의 신분임을 발견했다.그러나 장여주는 조정에서 요구한 성시(省落)에 낙방하지 못해 특주명전시(特名名殿的)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그리고 장여주는 거짓으로 서류를 위조해 자신의 낙방 횟수를 몰래 늘렸다.이청조가 장여주를 고발한 것은 성시 횟수를 늘려 정상고시를 우회하고 하등진사 신분을 먼저 취득한 뒤 이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는 죄목이다.여기서 '망증'은 제멋대로 늘린 것이고, '거수'는 성시(省省)에 참가한 횟수, '입관'은 관직에 들어간 것이다. 치르지 않은 시험 횟수를 거짓으로 늘려 벼슬을 한 것을 죄목으로 들어 고발하였다. 이청조는 장여주의 부정행위를 발견하고 단호히 조정에 고발하여 장여주가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한 이유는 자신의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치이자 대의멸친과 공평한 정의를 지키려는 명분 때문이었다. 만약 장여주의 인간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의 시험 부정을 미리 알았다면 이청조가 장여주와 결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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