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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21. 2023

심야에 서양철학사 책을 펼치고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간략히 답변하자면 이렇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철학이 우리가 알고 있든 모르든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지성적인  짐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과 성숙해지는 편이 좋은 것이다!"


군나르 시르베크와 닐스 길리에가 짓고 윤형식 교수가 번역한 <서양철학사>의 들어가는 말 첫 문장이다. 일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해운대 디지털교육원에서 백민경 강사의  'GPT챗을 활용한 AI 영상제작'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엄청난 세상을 목격한 듯하다. 단 두 시간 만에 다섯 가지 앱을 활용하여 동영상을 AI의 도움을 받아 제작하는 과정이 신기하고 놀랍다. 나에게 무리였는지 돌아오자마자 그냥 뻗어버렸다. 몇 시간 자고나서 책상에 앉았는데 세상은 깜깜하고 가족들은 잠에 들어 있었다. 그냥 자긴 뭐해서 펼친 것이 바로 이 책 <서양철학사>였다. 


대학에 막 입학한 즈음에 학교 도서관에 TOEFL책을 들고 가서 영어 공부하려 했을 때 같은 반 친구 하나가 정말 두꺼운 철학책을 심독하고 있었다. 그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빨리 대학을 졸업하여 취직해야 하는데,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저런 철학책을 파고 있다니 한심한 놈이군!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 친구의 온화한 인상과 넉넉한 마음씨가 지금도 바로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이름을 잊어버렸다. 아마도 대학교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진정한 연구자의 자세를 대학 1학년 때부터 가졌던 그 친구가 지금 참 그립다. 철학 책과 전혀 다른 질문을 해도 잠깐 책을 덮어놓고 따뜻한 미소로 대답해주던 그 친구 끝 이름이 '식'자임은 기억하는데 나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 이렇게 참으로 늦은 나이에 갑자기 서양철학사에 그것도 심야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두껍기 그지없는 책에 빠질 줄은 정말 몰랐다. 그 긴 세월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참으로 많았을 텐데, 세속 물욕에 찌들어 매여 살았던 탓에 철학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진정 부끄럽다. 그리고 당시 그 친구에게 가졌던 마음에 대해 진정으로 후회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참으로 모자란 중생인 내가 진짜 연구자의 길을 걸었던 친구를 우습게 생각하였다니. 


탈레스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서양철학사가 재미있게 느껴질 줄은 예전에는 몰랐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는 탈레스의 말을 천착해 가는 과정은 흡사 과학적인 진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하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등등도 언급하고 있으니. 


이 책 20쪽과 21쪽에 걸쳐 아래 문장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철학적 답변의 의미는 무언가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어쨌든 우리는 싱이한 함축을 갖춘 상이한 답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철학적 문제에 어떤 답변을 제시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치 이론은 개인을 제일 중요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회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상이한 함축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답변이 어떤 함축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어떤 대상이나 문제에 대해 아니면 인간관계에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정말 많이 경험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를 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내 생각만 상대방에게 강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를 몰라준다고 상대방을 곡해만 하고 살았다. 오직 실용적 가치에만 매몰되고 살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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