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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23. 2023

세태는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생각합니다.


김정희는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1844년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김정희는 세한도 그림에서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가장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제주도 유배 시절 변함없이 자신을  제자 이상적에게 그의 성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고 그림 곁엔 그림으로 못 다한 그의 신의(信義)에 대한 애절한 고마움과 세상사를 밝힌 대목이 있습니다. 조정의 눈에 찍히기 딱 좋은 처신이지만 스승에 대한 변함없는 의리를 보여 준 제자 이상적의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큰 감동을 줍니다.



사마천의 사기열 전 중에 급암(扱黑音)과 정당시(鄭當時)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 말이 오버랩됩니다. 중국 한 무제 때 급암과 정당시라는 어진 신하들이 현직에 있을 때는 손님이 넘치다가 좌천되었을 때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는 것 말이지요. 



이를 두고 사마천은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賢人)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세력을 잃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면서 적공(翟公)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그 또한 해임되자 집이 한산하다 못해 문 앞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정도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공(翟公)이 다시 관직에 오르자 손님이 다시 몰려오는 염랑세태를 풍자하며 대문에 이런 글귀를 붙입니다.


 " 한번 죽어보고 살아나면 사귀는 정을 알 수 있고,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자가 되면 사귀는 행태를 파악할 수 있으며, 한번 귀하게 되고 한번 천하게 되면 사귀는 어떤가를 알 수 있다 (一死一生乃知交情 一貧一富乃知交態 一貴一賤交情乃見)"


사람 일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당장 쓰러져 절대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여도 내일 당장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고, 지금 천하를 쥔 것처럼 내 것인 양해도 내일 아침에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람 일이고 권력입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변치 않는 사람이 진정한 사귐의 정이 아닐까 합니다. 




아래 내용은 최성택 동양칼럼(2023.5.10일자)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통해서 본 인간관계" 발췌 인용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이야기 좀더 할까요. 세한도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는 흔히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인간세태를 언급할 때 흔히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는 뜻이다. 세한(歲寒)은 혹독한 추위를 뜻하는 말로 혼란한 세상, 곤궁한 처지를 비유하고, 송백(松柏)은 한 겨울의 눈바람과 서리를 이겨내고 푸름을 유지하는 절조의 상징을 이른다.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데,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출사를 비롯한 여러 삶 속에서 경험하면서 곱씹었을 구절이라 생각합니다.  편안하고 행복할 때는 몰랐는데 사람이 궁벽하고 힘든 생활에 처했을 때 주위 사람이 어떻게 나를 대하는가를 보면서 인간의 참모습을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생각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입니다.



김정희(1786~1856)의 증조부 김 한신은 조선21대 임금 영조의 화순옹주와 혼인하였으니 노론 벽파 집안에서도 대단한 가문임을 알 수 있지요. 24살(1810)에는 청나라 파견 사절단 '동지사 겸 사은사'  부사(副使)인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옴으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통해 조선 최고의 학자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추사가 45세 되던 해 부친 김노경이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 되었고 그 후 10년이 지나서는 자신마저 조선 헌종 시절 옥사에 연류 되어 제주도 대정현 으로 귀양 가 9년간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습니다. 위리안치는 집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유배 형벌이지요. 외출을 금지시킨다는 연금생활과 비슷하겠지요. 더욱이 추사의  가장 친한 친구 김유근이 사망하고 반대파들의 박해도 끊이지 않았으며 친한 친구들의 소식도 점차 끊어지자 김정희는 오직 책을 벗 삼아 지내는 외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김정희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은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었습니다. 이상적은 통역관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구하기 힘든 최신의 서적을 구해 김정희께 보내주었습니다. 한번은 연경에서 「경세문편(經世文編)」이란 책을 구해다 보내 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만학집’ ‘대운산방집’ 등을 부쳐 주었는데 어렵게 구한 책을 권력 있는 사람에게 바쳤다면 출세가 보장 되었을 텐데 멀리 유배되어 아무 힘도 없는 김정희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이때 김정희는 논어 자한(子罕)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는 의미입니다. 공자가 겨울이 되어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김정희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사람 됨됨이와 인간관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이상적을 공자가 생각한 송백(松柏)과 같은 사람임을 깨닫고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으나 지금의 자기 형편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김정희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송나라 소동파가 그린 「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소동파가 혜주로 유배되었을 때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부친을 위로하기 위해 그 먼 곳까지 찾아 왔습니다. 어린 아들의 방문에 너무도 기뻤던 소동파는 아들을 위해 「언송도」라는 그림 한 폭을 그리고 아들을 위해 칭찬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상적이 보내준 책을 받아든 김정희는 혜주로 유배 된 소동파와 제주도로 유배 된 자신의 상황 그리고 소동파를 위로하기 위해 멀리 찾아온 어린 아들의 마음과 멀리서 어렵게 책을 구해다 준 이상적의 의리를 생각하며 소동파가「언송도」를 그렸듯, 김정희는 자신만의「언송도」를 그리기로 했지요. 김정희는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 나갔습니다. 창문 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한 채, 앙상한 고목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을 매달고 그 집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잣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또 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 내려갔습니다. 겨울에도 늘 푸른 송백에 비유해서 이상적의 의리를 칭찬한 글입니다. 그림을 마친 김정희는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藕船是賞-우선(이상적의 호)은 감상하시게)’ 이라 쓰고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이라는 인장을 찍었습니다. 김정희를 감동시킨 그 의리와 절개를 그린 세한도는 조선 지식인의 핏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고난 극복과 푸르름을 지켜낸 절조의 상징입니다.


최성택 동양칼럼(2023.5.10일자)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통해서 본 인간관계" 발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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