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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27. 2023

숲속을 걸으며

세월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고 했지요. 요즘 딱 그런 심정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금방 며칠이 동시에 흘러가는 듯합니다. 푸르른 자연을 여유있게 돌아보며 커피라도 한 잔 마시는 여유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흐름에 묻혀 그런 여유를 잘 못 느낍니다. 커피도 순식간에 마시고 다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정 때문에 그럴까요. 노후 세대들이 하루 하루를 무료하게 보낸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막사에 제가 본격적인 노후에 들어서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네요. 물론 공원 나무 아래서 하루 종일 바둑이나 장기 아니면 소줏병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긴 해요. 


운동 삼아 숲속을 걸었습니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곧장 숲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산보에는 아주 적당한 곳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유엔에서 정한 청년 나이를 언급하며 스스로  아직 젊었음을 강조하지만 제가 보기엔 역시 나이는 무시 못합니다. 당장 몸을 움직이는 것이 둔해집니다. 젊은 날에는 발차기를 하면 얼굴 위까지 곧장 발이 올라갔는데 지금은 가슴팍 정도 높이가 최대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젊은 날엔 벌떡 일어났지만 지금은 조심 조심 천천히 몸을 풀어가며 일어납니다. 


나이가 들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건강, 경제적 여유, 친구 관계, 추미, 소일거리, 봉사활동 등을 떠올릴 수 있지요. 그러고 보면 젊은 날보다 해야 할 것이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현직에서 벗어나 경직된 조직 생활과 엄격한 하루 일과가 주는 스트레스에선 벗어나 자유를 누릴 기회가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하루 24시간 온전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아무 생각이나 계획이 없이 그냥 눈을 뜨면 그 귀한 시간들이 순식간에 공중에 허무하게 사라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인생 어느 순간이라도 귀하지 않은 때가 없는 모양입니다.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고 집에 혼자 남았다가 집을 나와 산보하러 숲속을 거닐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지나가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렇게 서로 인사하면서 각자 근황을 간단히 주고받습니다. 숲속을 거닐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여유를 누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런 여유도 오롯이 누리기 어렵네요. ㅎㅎ. 인생이란 다 그런 모양입니다. 


잠깐 소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갑니다.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면서 햇살도 따가울 법한데 숲속 나뭇잎들 사이로 빗겨 들어오는 햇빛은 의외로 부드럽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간단하게나마 회상해 봅니다. 시골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시내로 고교 진학 그리고 대학 나아가 교직까지 대부분 평탄한 생활을 보낸 듯합니다. 결혼 36년 째가 되었고 아이들 3남매도 잘 커주었습니다. 아내의 건강이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집은 화목하게 잘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혼자 숲속을 걷고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으니 제 지나온 삶에 크게 후회되는 것은 없지만 아쉬움은 조금 있는 듯합니다. 


다시 고교시절로 돌아간다면, 아아 스무 살 그때가 정말 좋았는데, 아니 군복무 후 제대했을 때 세상 모두 내 것인 것 같았는데, 온가족이 낙동강 변 밭에서 배추를 심으며 저녁 석양을 함께 바라보았을 때 정말 행복했는데, 결혼 후 아이들에게 좀더 많은 기회를 주었어야 하고, 아내에게 좀더 잘 했어야 하는데 등등 온갑 생각이 갑자기 동시에 얽혀 떠오릅니다. 대체로 제 삶은 평탄하고 행복하고 좋았지만 문득 문득 어느 때는 이렇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현실, 현재에 충실하게 살자는 것이 젊은 시절 제 자신과의 약속이었고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면 후회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매사에 열심히 살았습니다. 주위에서도 그렇게 저를 평가해 주기도 했지요. 그런데도 사람 욕심이 끝이 없는가 봅니다. 더 열심히 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요. 숲속의 다양한 물상들을 바라보면서 저들도 생존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할까 생각이 드네요. 숲속에는 정말 엄청난 생명들이 존재할 것이고 각 개체들도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지만 훗날 세웡이 지나 저 물상들도 생각이 있다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후회와 아쉬움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에 젖어봅니다. 


이제 숲속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일상 속으로 들어가 더욱 열심히 살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들을 가급적 허비하지 않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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