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바느질로 만든 그림
이제껏 나뭇가지가 휘어지게 매 달린 사과 밭 길을 지났다.
이젠 눈이 부시게 노란 은행나무 사이를 지난다. 그러더니 이번엔 한 걸음으로 올려 딛기엔 힘겨운, 높은 계단이 이어진다. 차례로 나타나는 삼단의 돌 축대를 올려 본다. 산등성이를 타고 칸칸이 올라앉은 이 절집의 제일 꼭대기에 그녀가 있다. 층마다 만나는 오래된 문을 고개 숙여 지나야 하고 또 그 양쪽에 날개처럼 앉아 있는 절간을 향해 가쁜 숨으로 인사를 해야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오래전, 사람들은 절을 세웠다.
세속의 삶을 버리고 대 자연의 정신세계로 들어섰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에 눈을 질끈 감았으며 또 얼마나 귀한 것들을 버렸을까? 의상대사를 사모했던 선묘는 그이 때문에 속세의 삶을 포기하고 비구니가 되고 또 결국에는 용이 되었는데…… 그녀는 절의 창건을 방해하는 산적들에게는 큰 바위를 날려 위협을 하고 당나라에서 먼 길을 올 의상을 위해 용이 되어 그의 귀국 뱃길을 지켰다. 이 절의 이름을 만든 그녀의 그 ‘부석’(浮石)은 그 이름을 새긴 채 무량수전 앞마당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의상을 호위하던 선묘 용은 결국엔 의상의 곁을 영원히 지키는 땅속의 용이 되었다. 후에 무량수전을 수리하느라 앞마당을 발굴하니 머리는 무량수전 불상 밑에 두고 꼬리는 앞마당 석등 밑에 둔 허리 잘린 용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허리가 잘린 용.
이 절이 속한 고장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로 꼽히는 곳이다. 십승지지란 ‘천재지변이나, 전쟁, 기아 등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안전한 곳 열 군데’를 이르는 말이다. 이런 명당, 복 받은 땅에서 그녀는 어쩌다가 허리가 잘리는 험한 일을 당했을까? 그녀의 어렵기만 했던 그 사랑 때문이며 그녀가 선택했던 그 인생 때문 일 것이다. 사력을 다해 그 누구를 지키다가 결국엔 힘이 부쳤을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을 버렸지만 끊어진 몸으로 영원히 의상의 곁을 지키며 누워서 그 끊어진 허리 때문에 다시는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곁을……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그 유명한 배홀림 기둥을 등 뒤로 하니 끝없이 펼쳐진 태백산맥이 눈에 가득 찬다. 발 밑에는 분명히 용의 비늘이 묻혀 있을 텐데 눈 앞의 산하는 흡사 바다의 푸른빛을 띠고 있으니, 이 용은 저 산맥의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싶지 않을까? 산맥 끝으로 맞닿은 저 하늘을 향해 그 어렵기만 했던 인연을 하소연하며 용트림하고 싶지는 않을까? 부처의 구도 보다도 호국의 정신 보다도 더 절실하고 고귀했던 그 사랑의 마음을 접고 이제는 다시 푸른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을까? 그녀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세상이나 삶을 등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관광객들로 복작거리는 절 집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세상을 버렸지만 세상을 떠나지 못한 용이 이곳에 있다. 지금 그녀의 생각밖에는 도무지 들지가 않는다. 무량수전 앞마당의 석탑은 아직도 푸른 이끼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데 그 앞에 맴도는 따뜻한 공기는 가을바람과 함께 훌쩍 사라 질 채비를 하고 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세상의 인연에 관대해지고 싶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 지금 이 바람과 함께 허공에 떠도는 이 곳의 기운 그리고 저절로 흘러갈 세월이 도움이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