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처니 Aug 01. 2022

왜곡된 사회에서 희생된 사람

내가 만난 새로운 세계(1)

 28살의 나는 7년의 긴 연애 끝에 3살 연상의 남자 친구와 결혼했다. 기대와 설렘을 안고 행복했던 순간이 단 며칠 만에 소멸하리라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채, 이듬해에 큰 아이를 낳았고 20개월 터울로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둘째의 존재 여부를 알게 된 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모두 사용하고 복직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뱃속에 둘째 아이를 품고 9개월을 채워 회사에 출근했다. 휴가와 휴직을 반복하고 또다시 복직했지만 내가 전업맘이 되는 시기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누구의 도움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워킹맘을 한다는 건 예상보다 많이 고되고 험난한 길이었다. 큰아이 5살, 둘째 아이 3살, 그렇게 전업주부가 되었다.     


 예식장 답사를 가던 날,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자동차 운전석과 조수석에 함께 나타난 예비 신랑과 시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예식장 두세 군데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시어머니께서 마음속에 점 찍어 놓으셨던 서울의 작은 호텔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돌이켜보면 신혼여행지에서부터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었겠으나 둔한 건지 콩깍지가 씌어 안보인 건지 못 본 건지 아무튼 나는 보지 못했다. 신혼여행지로 떠났던 괌에서 남편은 시부모님께 매일 전화드렸다. 아니, 내게 안부 전화를 드리게 시켰다. 꼭 그래야 하는 듯 내게 명령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다. 그리고 정확히는 신혼여행을 하고 온 후부터 어머니의 간섭과 집착에 힘들었다.     


 결혼 후 자연스럽게 시부모님의 다가구 건물 2층에 신혼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 시동생이 결혼하면서 같은 건물에 살게 되었다.     


 시부모님께서는 삼십여 분 거리의 다른 동네에 살고 계셨지만, 시어머니는 나와 매일 안부 전화를 해야 했고, 내가 어쩌다가 전화를 못 하는 날에는 “이게 전화도 안 하고!”라고 말씀하셨다.     


 일주일이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매일이었음을 정확히 짚어 말하는 것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생각의 다름을 넘어 틀린 것 같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 낼 수 없었다.  

   

 결혼 1년 뒤 큰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매일 안부 전화에 더해 평일 4~5일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가 쉬는 주말 중 하루는 어김없이 시집에 가기도 해야 했다. 오라면 가야 했다. “엄마가 오라면 가야지.” 남편은 그랬다. 결혼 생활 3~4년 차를 지나면서는 상황이 조금 나아져 2~3주마다 한 번 주말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남편에게 혼자 다녀오라고 말하면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에 대해서는 지금도 설명하기가 힘들다. 결국 나는 주말 아침 일찍부터 평일에 제대로 하지 못한 집 안 청소를 하고 서둘러 아기 짐 보따리를 쌌다. 내 몸 치다꺼리는 할 틈도 없이 아기들 치다꺼리를 한 후 다 함께 시집으로 향하는 패턴에 응하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열 번에 아홉 번을 시모로 인해 싸웠다. 반복되는 갈등에서 나는 점점 남편의 모든 것에 넌더리가 났다. 남편이 효자 노릇을 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효도를 명령하고 있다는 문제가 존재했다. 내게 대하는 무시의 말과 태도, 무관심은 나의 몸과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내 친정에 일 년에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형식적인 안부 전화를 했다. 특별한 날 정도에만 처가에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없다. 그런데 시집에서는 내게 매일, 매주 전화와 방문이라는 일방적인 대우를 바란다. 어째서 이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이른 걸까. 한번 고착된 잘못된 생각을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매일 전화 통화를 하고 찾아오시는 가운데서도 시어머니는 종종 느닷없이 따져 물으셨다.

“너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전화 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았다. 서랍장 위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꼈을 때도 아이 닦이느라 수유하느라 몇 가지의 시중을 드는 이유로 전화를 못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밤에는 두세 시간마다 일어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여야 했다. 낮에 아이가 잘 때는 못 한 일을 해야 했다. 가끔 너무 피곤한 날은 아이가 낮잠을 잘 때 같이 자기도 했는데 어김없이 시어머니의 전화가 우리의 낮잠을 깨웠다.     


 커다란 가방에 아기들이 새벽 동안 만들어낸 젖병을 가득 넣어 출근했다. 젖병 세제, 솔, 설거지 볼, 젖병 건조대까지 사무실 내 책상 한 귀퉁이에 자리했다. 후다닥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 가서 젖병을 닦았다. 퇴근 후 다 건조된 젖병은 다시 가방에 실어 날랐다.     


 싱크대 앞에 서서 국에 밥 말아 입속에 욱여넣는 모습은 드라마 속에만 나오는 장면이 아니었다. 나 씻는 일은 남편이 온 후에나 할 수 있었고 그야말로 쉴 새 없이 그렇게 정신이 없었다.   

  

 전화가 온 것을 알고도 못 받았을 때는 마음이 조급했다. 빠르게 할 일을 끝내고 보통은 30분~1시간 이내에 다시 전화드렸는데 하루하루 숨이 막혔다. 부재중전화를 확인 후 전화를 한 내게 “뭐 했니? 바빴니? 음.” 하시는 찝찝한 물음에 취조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은 “너 내가 호구로 보이냐?”, “너 내가 우습냐?”와 같은 폭언도 서슴지 않고 하셨다.   

  


 나는 이런 시어머니를 겪을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고 억울했다. 이런 봉변에 나야말로 불면증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달아올라 불덩이가 되어버리는 증상을 얻게 되었다. 한번 생긴 증상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혹은 어떠한 상황에서 내가 겪은 일들과 유사한 시월드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을 때 어김없이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 나를 뒤흔들어 놓기 일쑤였다.    

 

 설거지하면서 혹은 빨래를 개다가, 청소하다가 머릿속에 갑자기 생각이 들어와 박혀 버리면 어느 만큼의 땀을 쏟아 내기 전까지 결코 그 생각을 밀어낼 수도 밀어내지지도 않는 상태가 되었다.     


 머릿속에서 뿜어져 나온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은 마치 방금 머리를 감고 나온 것처럼 흠뻑 젖어 턱밑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중에도 자주 주기적으로 시어머니 당신께서는 늘 나로 인해 잠을 한숨도 못 자 입술이 부르텄다고 말씀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저 그런 것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대처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순간의 나를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 저한테 진짜 왜 그러세요?”라고 말했다가 “뭐?”라고 한마디 하셨을 뿐인데 그 강한 한마디가 어찌나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어 버리는지 용감했던 나의 소심한 말대꾸는 단박에 제압되었다.     


 그렇게 시어머니는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가 계속 무언가를 신경 쓰이게 했다고 하셨다. 이윽고 “너도 우리 집 식구가 되었으니 내가 널 사람 만든다고 생각한다.” 말씀하시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받아 낸 분노와 억울함을 어리석게도 내 어린 자식들에게 풀어냈다. 그렇게 나는 두고두고 자책과 죄책감을 안은 채 힘든 감정들과 악순환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외롭게 만들었던 걸까? 그녀가 집착하는 대상이 며느리가 되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며느리라는 존재가 그녀의 헛헛함을 채워줄 희생양이었을까? 나의 시어머니가 바로 왜곡된 사회가 낳은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고착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생각을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할 수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위태로우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 냈는지 아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결혼하고 16년이 지나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신체화 증상에 시달린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측은해진다.     


 가족과의 갈등에서 공감과 인정을 가르기란 무엇보다 어렵다. 어디까지가 공감이고 어디서부터가 인정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또렷이 알 수 있는 건 그것이 학대인 것, 나를 지켜내지 못한 자괴감에 오래도록 힘들었다. 이제야 나는 극복하는 어디쯤 서 있다.     


* 갑질러의 특징

대부분의 갑질러의 특징은 자기보다 수입이 적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생각한다.

내 돈 내고 내가 산 무엇이 있으면 ‘무조건 대접을 받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갑질을 하며 분노하기도 하고 화를 낸다.

본인들이 누군가에게 갑질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자기가 틀렸다는 생각을 잘 못한다.

내가 옳고 내가 좋은 사람이고 그러니 내 말이 맞는 말이며 틀린 적이 없다.

내가 널 가르쳐줄게. 너는 따르기만 해.

왜냐하면 나는 틀린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 집착러의 특징

너는 나를 만난 것을 고맙게 생각해라.

내가 유일한 사람이고 내가 널 사람 만든다고 생각한다.     


* 과도한 자신감

나만큼 너한테 잘하는 사람이 어딨냐며 주입한다.

스스로 높이는 경향을 보인다.     


* 더닝 크루거 증후군

상대방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내가 아는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이 세상을 판단하려고 한다. “상대방은 아마 나보다 모를 거야”     


* 평생을 살아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조차 옳은 것처럼 주장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거짓의 눈물이나 자기를 미화하거나 합리화라는 미혹에 빠지지 말고, 진정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자신의 그릇됨을 수정하여 옳음을 지향하려는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후회는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다짐의 시간이어야 한다.     


* 때로는 냉정하게 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거나 받거나 하는 것은 폭력이다.     

* 내가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 심리학자 프리츠 펄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