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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니 Aug 02. 2022

빼앗긴 시간

내가 만난 새로운 세계(2)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도 하셨다. 전화를 해서 안 받으면 연속으로 세 번, 네 번 일곱 번까지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던 적도 있었다. 어느 때에는 부모님 돌아가셨나 하는 생각이 순간에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숨이 막혔다.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지금 살고 있는 2층보다 넓은 평수의 4층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직 층간 이사를 하기전이던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나의 핸드폰이 마루 벽에 걸어놓은 수납주머니에서 진동으로 울렸나 보다. 마침 마루에 앉아 TV를 보던 남편이 내 전화를 대신 받았고 어머니는 나를 바꿔달라고 하셨다. 남편은 내가 지금 설거지를 하고 있다고 얘기 했고 그것이 어머니를 화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또 느닷없는 봉변을 당하는 상황에 처했다.     

 

어두워진 표정으로 남편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얼른 수건에 손을 닦았다. 전화를 받아들자마자 “야! 너 뭐 그렇게 전화를 못 받을 상황이라고 아들이 널 안 바꿔주고 설거지한다고 말하냐.” 어른이 전화를 하면 전화를 먼저 받는 게 예의 아니냐고 하셨다. 꼭 이 말씀을 하셨어야 했다면 아들과 통화할 때 아들에게 했으면 될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늘 그랬듯 다짜고짜 당했다. 그렇게 또 머리와 가슴이 둥당질하기 시작했다.     

잔뜩 흥분하신 어머니의 용건은 분명히 화를 낼 용건이 아니다. 4층으로 올라가게 되면 큰 청소기가 필요할테니 사주신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게 그렇게 당장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한 일이었을까. 설거지 끝나고 전화 해달라고 하면 안 될 일인가. 아들이 받았을 때 전달하면 안 될 말이었을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살다가 큰 청소기가 필요하면 그때 우리가 사면 될 일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잘못된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들고 있었다.      


이것을 호의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내가 못 되서 감사함을 모르는 걸까? 자꾸 나를 자책하고 의심하는 상황이 빈번해 질수록 나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리 꽂히는 느낌이었다.     


* 집착러의 특징

너는 나를 만난 것을 고맙게 생각해라.

내가 유일한 사람이고 내가 널 사람만든다 생각한다.     


* 갑질러의 특징

갑질을 하며 분노하기도 하고 화를 낸다.

본인들이 누군가에게 갑질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큰 아이 낳았을 때 돈 아깝게 산후조리원에는 왜 가야하냐고 해서 펑펑 울며 남편과 싸우던 일이 생각나면 몸이 반응한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 들고 있는 남자들이 꼴 보기 싫다시던 시어머니가 떠오르면 가슴이 답답하다.

자신이 먹은 그릇을 계수대에 가져다 놓는 걸 자랑스럽게 말하던 시동생이 떠오르면 쓴 웃음 지어진다.     

처가 어른들께 일주일에 한번은 카톡으로 안부를 전한다며 나의 처지와 비교도 안 되는 상황을 동일시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시동생이 생각나면 가슴에 불이 붙는다.     

큰 아이 출산 7~8일전 시집 제사에 참석 했다. 일 손 돕지 못한다는 마음에 불편함 가득 앉고 앉아만이라도 있어야 했던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힘들었다고 얘기하자 “참 대단한 일 했다‘며 무시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남편 덕에 눈물의 귀갓길을 했던 일이 생각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퇴근길 어린이집에 들러 아이들 낮잠 이불이며 가방을 내 몸 걸 수 있는 모든 곳에 걸었다.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걸리며 4층 우리집을 어기적어기적 오르던 중 무릎 인대가 늘어났다. 무릎을 굽힐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시집 제사에 한 번 불참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되었다. 남편은 내게 온갖 심술과 화를 내며 큰 아이를 데리고 보란 듯이 문을 쾅 닫아 버리고는 집을 나섰다. 제사를 마치고 밤 10시경에 반찬을 싸들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저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나를 용납 할 수 없다는 듯 보란 듯이 툴툴 거리던 남편이 생각나면 심장박동이 빨라짐을 느낀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여 점심시간쯤 전화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의 틈도 내겐 사치였다.

아침 출근길 내가 내리는 을지로입구역에 도착할 즈음 “야! 반찬을 받았으면, 전화 한통을 안 하냐?” 늘 그렇듯 또 사람 덜 된 나를 나무라는 어머니의 전화.      


* 과도한 자신감

나만큼 너한테 잘하는 사람이 어딨냐며 주입한다.

스스로 높이는 경향을 보인다.     

이미 바닥난 자존감이 아직도 내려갈곳이 더 있는 건지 아래로 아래로 추락했다. 마음의 상처 하나 더 적립하고 멍하게 출근길을 재촉했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두통약 한 알을 삼키고서야 나의 하루 일과는 시작되었다.      

결혼 후 한 번, 임신 중 김장에 참여 할 수 없었던 때였다. 평일 날 어머니 혼자 김장을 하게 되었고 출근을 한 나는 전전긍긍 마음이 불편했다. 점심시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돕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야! 너는 니 시어머니가 김장하고 몸살이 났는지 안 났는지 궁금하지도 않니?” 하신다. 아들에게는 말하셨을까?      


그야말로 나는 매일 꾸지람과 나무람에 자존감이 저 밑에 처박혀져 있었고 무기력해져 갔다. 내가 이 김치를 먹으며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 급기야는 ‘내가 못 된 사람이라서 그런 것 이라고 일부러라도 생각해야 하나?’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상태가 되었다.     


“니가 이러는거 알면 니 시아버지한테 너 진짜 큰일 난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던 어머니.      

“니가 그래도 이제 우리집 가족이니 내가 널 사람 만든다 생각 한다”며 나를 나락으로 나락으로 밀어 넣으셨던 어머니.      

언제나 가족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고 난 후 내게 전화를 하시거나 만나자고 하셔서 은밀하게 말씀하셨던 어머니.     

가족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나를 감싸주시기 위해 말씀 안하신다던 어머니였다.      


남편의 부족한 점은 친정에 가서 흉보지 말고 어머니 당신께 말하라고 하셨다. 어머니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은 나는 어리석었다. 남편이 집안일을 전혀 거들지 않아 맞벌이 하며 아이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던 나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니 나 스스로 기가 막혀 웃픈 상황이라 한없이 부끄럽다.


요즘 젊은 애들은 지 할 말 다한다며 아무리 여자가 배우고 돈을 벌어도 평등 평등 찾으면 집안 꼴이 어떻게 되겠냐고 말씀하시던 어머니가 떠오르면 지금도 탁 기가 막힌다.     


아버님 생신 보름 전, 나와 동서는 아버님 생신 장소에 대해 상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어머니께 아버님 생신에 대해 언급을 하게 되었다. 아들이 먼저 말을 꺼내 화가 난다고 나를 무라셨는데 지금까지도 왜 혼이 났는지 알 수가 없다.     


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어 정리를 했다. 아이들 읽힐 책을 챙겨오려고 했다. 남편은 운영이 어려워져 문을 닫게 된 마당에 굳이 다 필요 없겠다고 한다. 여자들은 집에서 아이들을 보는게 좋겠다고 한다. 자신의 부모님에게 한없이 생각이 깊은 남편이다.


“다른 이들이 밉게 보는, 경우 없는 행동을 일삼는 어른도 그 자식에게 내 부모는 가엽고 애틋할 것이다.”

      

역시나 낮 시간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있는 시간에 전화를 하셨다. “야! 너는 와서 공짜로 책 챙겨 가는 것도 그렇게 힘드니? 왜 아들이 지 마누라 생각한다고 아들들(형제)끼리 와서 가져간다고 하니?” 또 그렇게 꾸지람을 듣는 일상이다.      

당신 아들에게는 못하시는 말씀을 이렇게 나에게는 잘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설거지한다고 말한 것이 아내 역성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화가 나 며느리를 꾸짖는 행위.      

아버님 생신 이야기를 며느리인 내가 아니라 아들의 입에서 먼저 나온 것이 화가 나 며느리를 꾸짖는 행위.    하루라도 안부전화를 안 드리는 것이 아들이 아닌 며느리인 것이 화가 나 꾸짖는 행위.    

  

무엇을 인정해야 할까. 이 모든 것을 내가 만들어 낸 화 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SNS를 하는 것을 알게 되신 어머니께서 친구신청을 해오셨다. 숨길 것도 잘못한 것도 없기에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 또 내가 혼이 나야 하는 일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수 많은 글 중 나의 속상함과 생각을 쓴 한 두 편의 글이 내가 혼이 나야 하는 일이 될 거란 건 정말 상상 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빌라 4층에 살면서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몇 번 굴러 떨어졌다. 그 날은 이마가 움푹 파여 병원으로 뛰었던 유독 속상했던 일이 있었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다가 우리집 1층에 도착하면 유모차는 자물쇠로 잠그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는 앞세우고 걷지 못하는 둘째 아이는 아기띠로 옮겨 메고 4층을 올라다니느라 유난히 힘들었던 날의 글.   

   

결혼하여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남편이 미워 여자의 삶이 고되고 부당하다는 글을 썼던 것이 내가 그토록 혼이 나야 했던 일이었다.      


글이 문제가 되었다. 집세도 올려 받지 않고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너희에게 큰 보탬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내가 혼자 있을 때에 찾아 오셨다.

글이 문제가 되어 이참에 나가라며 굳이 내가 혼자 있을 때에 찾아 오셨다.     


당시 2층 신혼집에 맞추어 마련해 온 나의 혼수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너 혼수가지고 나, 네 시아버지한테 일체 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러 굳이 찾아오셨다.    

 

* 갑질러의 특징

대부분의 갑질러의 특징은 자기보다 수입이 적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생각한다.

내돈 내고 내가 산 무엇이 있을 경우에는 ‘무조건 대접을 받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자기가 틀렸다는 생각을 잘 못한다.

내가 옳고 내가 좋은 사람이고 그러니 내말이 맞는 말이며 틀린적이 없다.

내가 널 가르쳐줄께 너는 따르기만해.

왜냐하면 나는 틀린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남편과 7년을 연애했다.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남편에게 내가 친정아버지 술주정에 힘들다고 쓴 편지를 발견하셨다. “네 아버지 술주정 하신다는 거 알았을 때도 난 결혼 반대 하지 않았다”며 생색내듯 말씀하셨다.     

모든 일은 나 혼자 일 때 생겨났다.     

아버님께서 병원에 이틀쯤 입원하셨을 때였다. 퇴근한 남편과 함께 아이들 데리고 병문안을갔다가 나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머니는 나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말씀 하셨다.

“너 어린나이에 인생 그런 방법으로 사는 거 아니다”   

  

이 모든 일을 7년간 버티고 버티다가 내가 시집에 찾아가 가족들에게 고하던 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시며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더해 아들에게 물으셨다. “너 말해봐라. 이 분란이 네 어미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7년 세월 종지부를 찍고 시집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사 와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신경정신과를 찾아 가는 일이었다.

나는 살기 위해 난생 처음 신경정신과라는 곳을 찾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게 신경정신과라는 곳은 겁나고 어색한 곳으로 인식되던 곳이었기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었다.     

* 자식은 부모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어른이 된다. 성장은 나의 부모가 나처럼 한낱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모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태도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저자 임경선 작가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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