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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니 Aug 03. 2022

안녕하세요

내가 만난 새로운 세계(3)

여러번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은 동의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각오로 절대로 이사를 가지 않겠다는 남편과 치열하게 얘기 했다. 큰 아들 7살, 작은 아들 5살이 되던 해에 그렇게 우리가족은 이사를 했다.       

내가 잘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친정 부모님은 지난 7년 내 생활을 알고는 충격을 받으셨다. 친정 아빠는 몇 달을 새벽 어둠속에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없이 한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이사를 하게 된 결과 이전에는 대단한 과정이 있었다.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니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어머니의 친구분과 아들이 다니는 회사 근처에 집을 보고 오셨다. 어머니가 봐 둔 집 중에 고르라며 내게 말씀 하셨다.     

당연히 남편과 집을 보러 다니려고 생각했던 나는 당황했다.

남편과 내가 집을 알아보러 다녔을 때 어머니께 상의하지 않아서 황당했다는 어머니 말씀에 내가 더 황당했다는 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렇게 어머님의 말씀 따르지 않은 값과 시집에 가서 가족들 앞에 그 간의 일을 고했던 값은 이후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형수 돈 안 모으고 뭐했는데요? 우리 부모님이 집 해주면 가라는 데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동생에게 들어야 했던 말이다.     

역시나 둘이 있게 된 틈에 나는 또 그렇게 기습적인 막말을 들었다. 

“형수 뭐가 불만인데요?” 어머니와 같은 멘트를 시동생이 똑같이 했다.     

어머님의 집착으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시동생은 순간 불도저처럼 반응했다. “뭐? 집착? 말 똑바로 해! 형수 하나 때문에 지금 우리집이...” 역시나였다.      

이사를 하던 날 시동생에게 느닷없는 공격을 받고는 떨리는 손, 발 가슴을 꾸역꾸역 다스리며 눈물의 이사를 해야 했던 8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결같은 남편은 한결같이 나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아니, 보호해 줄 용기가 없어 보여서 더욱 실망감이 컸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남편의 보호를 바라던 나는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정말이지 내가 아니고 싶다.      


이 이벤트를 마지막으로 나는 시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 남을 배려하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에 대해서 더 알려고 하고, 공부하고 알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겸손해진다. 갑질하는 사람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을의 입장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충분히 내 경험을 통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옳다는 식으로 얘기해야지만 내 권위가 살아나는 것 같으니까. 


이사 하게 된 집의 전세자금이 모자라 남편과 상의 후 약 2천만원가량 대출을 했다. 이후 이것을 알게 되신 아버님께 꾸중을 들었다. 역시 나 혼자인 틈에다.


결혼 7년차의 우리 부부가 대출을 받는 것이 부모님께 꾸중 들어야 하는 일이라는걸 나는 정말 몰랐다.     


2년뒤 미친 전세보증금을 올려 달라기에 남편과 투쟁 끝에 집을 매매했다.

이정도는 대출도 아니라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절대로 대출은 할 수 없다고 했다. 모든게 달랐다.     

조금 큰 평수를 매매하고 싶었으나 대출 받다 남편이 쓰러지는 꼴은 볼 수 없었기에 한 발 물러섰다. 우리집은 3배 가까이 올랐다. 조금 큰 평수를 매매하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


7년이라는 세월동안 이 모든 일들이 늘 내가 혼자 있는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 

더는 이렇게 사는 것이 내가 내게 가하는 학대임을 깨닳았다. 이 모든 상황, 행동, 말 토씨 하나 잊지 않고 기억 나는 것이 괴롭고 원망스러워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비로소 바로 보게 되었을 때서야 건강가정지원센터, 신경정신과 등의 문을 두드렸다. 나 혼자 치는 몸부림에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여자가 참고 이해하면 집안이 조용하다고 하셨다.


둘째 아이 출산 후 3주쯤 되었을 때 주말에는 산후도우미 이모님께서 안 오셨다. 낚시터에 간다는 남편에게 화가나 싸우던 중 내 목을 조르던 걸 잊을 수 있을까? 내가 참았으면 조용했겠지. 이후 내게 ‘낚시터’라는 곳은 취미활동의 의미는 없는 곳이 되었다.      


그 일로 서러워 시어머니께 푸념 아닌 푸념을 괜히 했다가 “그럼 아들은 언제 스트레스를 푸니? 평등 평등 찾으며 여자가 똑같이 취미 생활 하려면 집안 꼴이 어떻게 되겠니?” 라며 기적의 논리를 말씀 하셨던 어머니를 어떻게 잊어야할까.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잊고 싶다.    

나의 친정아버지가 집안 일을 잘 하신다는 얘기를 동서와 나누며 시집에서 전을 부칠때다. 내 말이 듣기 싫어 죽겠다던 어머니를 잊고 싶다.     

그렇게 연결지어 나는 누명도 썼다. “아버님께서 집안일 안도와 주시는것 때문에 며느리가 아버님을 미워한다“며 어머님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분명한건 내 생각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 만나서 이 집 며느리들은 너무 좋겠다“ 시장에 가다가 마주친 시집 동네 이웃이 말했다. 어머니는 무척 뿌듯해 하셨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내게는 어른 선입견이라는것이 생겼는데, 어르신들께서 동네 정자에 앉아 도란 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만 보아도 “저 어르신도 겉으로는 저렇게 인자해 보이지만 며느리에게는 막장 시어머니 일거야”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한약 지어주고 주말마다 불러서 식사 해주시고, 반찬 싸주시고. 내가 30년을 우리 엄마랑 살았는데 우리 엄마 말을 믿지 형수 말을 믿겠어요?”라며 퍼부어대던 시동생.     

맞다. 맞는 말이다. 시동생의 그 말이 맞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되지 않았던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 그때의 나는 그것이 맞고 내가 어리석은 것임을 결단코 몰랐다.       


당시에 나는 직장에 출근해 점심시간을 이용해 아버님께 만남을 요청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종각,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출판사는 용두동이었으므로 가까운 편이었기에 점심 시간에 만남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날 일이 바쁘셨던 아버님은 다음에 만나자고 하셨다. 집에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큰며느리가 전화와서 만나자고 했다며 별 뜻 없이 어머니께 말씀 하셨다고 한다.     

당연히 다음날 내가 혼자 있게 되는 시간에 맞추어 어머니의 격양된 전화를 받아내야만 했다. “야! 너! 니 시아버지한테 무슨 말 하려고 전화했니? 너 이러는거 네 시아버지 알면 너 진짜 큰일난다!”     

둥당질하는 가슴을 누르며 이불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지르며 울어야 했다.  


시집에 가서 그간의 일들을 고한 후 어느 날, 아버님께서 우리집에 찾아오셨다.

“네 시어머니랑 30년을 넘게 살았고, 밖에서 사람들에게 신용도 좋은데 네게 이렇게 했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맞다. 맞는 말이다. 아버님의 그 말씀이 맞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되지 않았던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 그때의 나는 그것이 맞고 내가 어리석은 것임을 결단코 몰랐다.       

그렇게 아버님께서 우리집에 오셨던 날 내가 시집에서 고하던 그 편지를 한 부 줄 수 있겠냐고 하셨다. 그 자리에서 원본 그대로를 드렸다. 내용이 다르다고 왜 고쳤냐고 따지는 시동생의 공격을 또 받아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사실을 대항하여 말하지 못했다. 또 그에 걸 맞는 대응을 하지 못한 나를 자책했다.     

당시에는 무엇에 그렇게 기가 눌려 겁을 냈을까. 가족에게 고하는 편지를 구구절절 힘들게 써서 고하던 날 무엇이 두려웠는지 ‘이제부터는 도리를 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던 그 내용을 차마 읽지 못했다. 차마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시어머니의 전화와 간섭, 집착에 몸서리 치면서도 도움을 청할 대상이 남편밖에 없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와서 바보 같다. “니가 뭔가 의심스러우니까 엄마가 너한테 자꾸 전화 하시나보지”, “우리 엄마가 손주 보고 싶어서 매일 오시겠다는데”, “너네 집과 우리 집이 왜 똑같아야 되는데?”라는 폭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었다.      

나의 친정을 부름에 있어 너네 집, 그 집 따위의 막말을 들으면서도 폭언을 폭언인지 모르고 막말을 막말인지 모르며 살았던 내가 원망스럽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자괴감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나를 질책하고 자책하는 악순환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조금 더 당당하게 대처 할 수 있었더라면’하면서 나를 탓하고 원망하는 이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영영 없을까봐 두려웠다.     


최근까지도 ‘그 시절 왜곡된 사회가 만들었다고 합리화 시켜서라도 어머니를 이해해야 하는 걸까?’라는 갈등을 했다. 그러면 나는 또 나를 모지리 취급하고 질책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갈등을 그만두고 괴로워 하는 일을 그만두고 내가 모지리였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더 이상 모지리가 아닌 나를 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걸 인정하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제부터라도 나 스스로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는 마음이 확고해 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모지리가 아니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한 편이 되어 말하겠지.

“며느리 하나 잘못 들어와 집안을 망쳐놨네”     


힘든 중에 세월은 흘렀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새댁 소리를 듣던 그 시절의 내가 아니다.      

어머니의 이중성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가슴 두근거리고 식은땀을 흘리던 그 시절의 나는 이제 없다.      

그러나 불쑥 기억이란 놈이 들어와 몸과 마음을 쑥대밭으로 뒤흔들어 놓을 때도 있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예전 만큼 괴롭지 않다는 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직접 보지도 듣지도 않은 것에 신경 쓰는 시간이 아깝다. 나를 욕할 사람들을 상상하는 시간이 아깝다. 가슴앓이 하는 시간은 더욱 낭비다. 무의미한 생각을 하며 고통 받는 나는 없다.


세월이 유수 같다. 사십대 중반이 되고서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외롭고 가여운 사람이다.

그녀는 왜곡된 그 시절 사회의 희생양이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가엾은 가해자가 되었고 피해자를 낳았다.   

  

나는 가엾은 가해자가 만들어낸 피해자이다.

가여운 사람에게 희생당한 가여운 사람이다.     


시어머니가 처음이었던 시어머니.

며느리가 처음이었던 며느리.

이런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는 무지했다.

무지함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 받았다.  

   

용인 될 수는 없다.

비수가 남긴 상처 자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부디 안녕하시길 기원한다.     


* 평생을 살아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조차 옳은 것처럼 주장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거짓의 눈물이나 자기를 미화하거나 합리화 라는 미혹에 빠지지 말고, 진정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자신의 그릇됨을 수정하여 옳음을 지향하려는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후회는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다짐의 시간이어야 한다.    

 

내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지.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며 가야지.

그렇게 꿋꿋이 남은 길을 걸어가야지.  

   

8년 동안 차마 열어볼 수 없었다. 어느 날 급작스레 용기가 생겼다.

비로소 편지를 열어 볼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생겼다.

용기가 사라질까 조급했다. 더 미룰 수 없었다.     


* 글을 쓰는건 건강해지고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다.  

   

글을 썼다. 쓰고 드러내 들여다보니 치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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