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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니 Aug 23. 2022

조금 덜 치열했더라면 조금 더 사랑했을까(1)

내가 만난 새로운 세계(4)

자식은 부모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어른이 된다. 성장은 나의 부모가 나처럼 한낱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모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태도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저자 임경선 작가는 주장했다.       

이렇게 정리된 문장을 일찍 발견했더라면 우리는 조금 더 똑똑하게 방향을 잡고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내가 거길 왜 가야 하는데!”

우리 사이도 계속 더 안 좋아지고 아이들에게 자주 화풀이를 하게 되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 힘들어함께 부부상담을 가보자고 제안했을 때 남편은 단칼에 거절했다.     

길동에서 지낸 7년은 괴로움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동네가 되었다.

가끔 그 지역을 지나는 일이 있을 때에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몸이 기억하고 반응을 한다.      

아빠 엄마가 결혼식을 한 곳이야. 이 곳 산부인과에서 너희가 태어났어. 여기는 너희 돌찬치를 했던 곳이야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던 곳, 아이들의 어린시절을 보낸 그 곳은 내게는 숨막히고 나의 자존감을 모두 갉아먹은 곳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추억(?)을 꺼내 얘기하지 못했다. 극복하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하고서야 비로소 조금은 담담하게 말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 의식을 치르고서야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얘기 해 줄 수 있었다.  


당시 남편은 내게 아무런 도움도 의지도 되지 않는 존재였다.

남편이 미웠고 그 단계를 넘고서는 급기야 남편이 너무 싫었다.      

내가 남편과 7년을 연애 할 때 주변에서는 우리를 대단하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남편과 나는 7년의 긴 연애 기간동안 함께 한 추억이 정말 많았다.

2001, 우리는 꽃다운 22살과 25살 나이에 만났다. 다음해인 2002년 열린 월드컵에서 열렬한 응원을 함께 했고, 많은 곳들을 여행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함께한 추억이 많았을 뿐 깊이 있는 대화나 공감을 나누는 것은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결혼 후, 시집의 울타리에서 힘들어 할 때, 정확히는 시어머니의 집착으로 내가 힘들어할 때 남편은 나에게 어떤 힘도 위로도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울타리의 한 멤버로서 내게 상처를 주고 몰아붙였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맞벌이를 할 때에는 내가 슈퍼우먼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제발 집안 일을 같이 하자고 애원하고 계획표를 만들어 보여주었을 때에도 그것을 밀쳐냈다.       

임신 9개월까지 직장에 출근하고 돌아와서도 밥을 해 차리고 치우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야말로 남편은 숟가락과 리모컨을 손에 쥐는 일만 할 줄 알았다.

분노가 치밀었고 매일 싸웠다. 그래도 나아지거나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기간을 보냈다. 시어머니가 언제 오실지, 언제 전화를 하실지 대비 해야 했기에 집에 있어도 늘 불안했다. 빌라 건물의 1층 현관문 여닫는 느낌, 전화기 진동 느낌에 노이로제 걸려 있었다. 씻을때에도 전화기를 욕실장에 넣어 놓았다. 그래도 불안한건 매한가지 였지만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다시 복직을 했다. 두시간 마다 깨서 입술을 오물오물 거리고 쩝쩝대는 아이에게 분유를 먹여야 했다. 잠을 잔건지 안 잔건지 모를 밤을 보내고 새벽 5시에 맞춰둔 알람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 출근하지 말란 말이야?” 남편은 내내 본인의 출근 사실만을 이야기 하며 코를 골고 잤다. 출근을 해야하는 사실은 나도 같았다.     

전날 저녁 설거지를 마친 이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온 젖병들을 커다란 루이비* 명품 가방에 넣고 출근 했다. 시어머니께서 명품 가방을 하나 사주셨는데 자연스럽게 그 명품 가방은 젖병을 실어나르는 가방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가방도 사주시고 좋네이런말을 참 많이 들었다.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뿐이었다.     

몸을 벌떡 일으켜 씻은 후 내 준비를 먼저 했다. 나 어릴때와 크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내 아이들은 유아기까지 감기를 달고 살았다. 전날 밤 소분한 약을 챙기고 어린이집 알림장에 당부사항을 꼼꼼히 적어둔 수첩과 잘 마른 식판과 물을 챙기고 가방은 현관 앞에 놓아 둔다.      

아기 먹일 아침밥을 준비하고 옷을 챙긴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머리에 티를 쑥 집어 넣어 통과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옷 갈아입히기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겨울이면 점퍼까지 입히고 챙기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아침밥을 먹이는 것까지 끝이나면 드디어 나설 채비를 한다.

아기띠를 둘러 메고 젖병이 들어있는 커다란 명품가방과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까지 양쪽 팔에 하나씩 걸고 신발에 발을 욱여넣었다.

5시부터 720분까지 출근 준비를 마치고 또 다른 일터인 회사로 출근 길에 나설때면 계절에 상관없이 주룩주룩 땀이 흘러내렸다.  

일어나서 자기 몸 하나 씻고 옷입고 출근하는 남편을 바라보면서는 참 부러웠고 화가 났다.

그 당연한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이 나는 너무 부러웠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그 행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찍 문을 여는 어린이집을 찾기 힘들었지만 어렵게 찾은 가정 어린이집에는 원장님이 상주 하셨기에 내 아이를 1번으로 받아 주셨다. 돌쟁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 놓고 출근하는 엄마의 애틋함이나 미안한 마음이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들지 않아서 죄책감이 밀려오곤 했다.       

지하철 안에서 한 시간을 끼여 서서 가는 길도 내 몸 하나인 그 자체로 행복했다.

회사에 도착해서 업무를 보면서 비로소 아이가 잘 놀고 있을까?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 질수록 또 다시 아침과 같은 일과를 시작하러 가야 하는 것에 숨이 막혔다.

 

회사에 가서는 틈틈이 물티슈, 기저귀, 기타 필요한 물품을 검색하고 주문했다.

공과금을 내고 경조사 일정을 챙기고 송금도 하고 인출도 해 놓아야 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상사분께 부탁의 말씀드리는 일이 잦았는데 조퇴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감기 진료를 받으러 소아과에 가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는 중에 매일 시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가끔은 혼이 나는 일도 나의 일과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퇴근 후 차려 놓은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티비를 보는 일은 남편에게는 참 당연했다. 그 당연해 보이는 퇴근 후 일상이 나는 너무 부러웠다.      

가슴속에서는 불꽃이 활활 일었다. 불꽃이 치솟아 밖으로 분출이 되면 주룩주룩 땀으로 흘러 내렸다. 불꽃이 이내 잦아들때면 내 몸과 마음이 축 늘어졌다.      

같이 좀 하자며 화를 내면 싸움이 되었다. “누가 회사 다니래? 그럼 네가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 오던가이런 막말과 폭언이 뒤따랐다.

벽창호 같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는 딱 죽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20개월 차이로 둘째가 태어나고서는 이와 같은 상황에 몇 배는 더 가중 된 삶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아이들이 5, 3살이 될 무렵 나는 직장을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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